말을 디자인하라
말을 디자인하라
  • 남해안신문
  • 승인 2018.10.0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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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36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지난 주에 진남문화회관 공연장에서 범민문화재단 주관한 ‘톡,톡,톡 시 토크’인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이 있었다. 패널로 참여한 나는 ‘디자인된 말의 힘’과 시의 관계성을 풀어보려 사진 한 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첫 말문을 열었다.

사진은 올 6월에 함양 화림동 계곡으로 문학기행 갔다가 가져왔던 이끼가 파랗게 낀 노송 죽순에서 솔씨가 싹을 틔운 것이었다. 분명 ‘아침에 만난 기적’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뭐라고 한마디 해줘야 하는데 마땅한 말은 생각나지 않고 호흡 깊숙한 한음절의 감탄사만 튀어 나왔다.

그러면서 모든 풍경은 한 음절의 깊이라는 한 문장에 떠 올랐다.

 

모든 풍경은 한음절의 깊이다

아!

때 묻은 말도 욕스런 말도 함께 정화하는

저 불립문자

모든 풍경은 한음절의 울림이다 - 신병은 <풍경의 깊이>

 

이렇게 시를 한편 줍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그 상황을 읽은 문장들이 술술 나왔다.

와, 너, 도데체 어디에 숨어있었던 거니?

사랑의 기적이야,

바람과 햇살의 기억이야.

위대한 탄생이야.

내 안에 누군가가 있구나.

어떤 상황을 근거로 하여 나온 이런 말들이 디자인된 말이다. 이렇게 디자인된 첫 말문이 시가 된다.

創은 ‘시작하다, 비롯하다’의 뜻이고, 見은 ‘보다, 나타나다’의 뜻이다.

창의적으로 보려는 사람은 다르게 보려는 힘이 있는 사람이고,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으려는 사람이면서 ‘으례’라는 단어와 늘 싸우는 사람이다.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니 뭐하노

햇빛 멱살 잡고 놀고 있다

와 햇빛이 머라카더나

아이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시비 한번 걸고 싶었다

봄이다 아이가 -신병은 < 봄, 피다>

 

따스한 봄햇살, 살랑대는 봄바람, 노곤노곤한 식곤증, 지천에 꽃이 피는 봄날, 그냥 지나가는 바람에게도 시비 한번 걸고 싶고 햇살에게도 해찰 한번 부리고 싶은 봄날의 서정을 표현했다.

디자인된 말은 사람을 읽는 힘, 즉 입술의 언어보다는 사람이 보이는 마음의 언어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어떻게 인간적으로 말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언어다.

내가 학교 근무할 때에 대책없는 말썽꾸러기가 한명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늘 말썽을 일으키는 트러블메이커였다. 이 녀석에 대한 한줄 평을 생활기록부 종합란에 뭐라고 기록할까를 고민고민한 적이 있다. 마음 같아서는 ‘싹수가 노리끼리함’ 이렇게 적고 싶은 녀석이었지만, 생활기록부는 평생을 따라 다니는 지문 같은 기록이기에 그렇게 쓸 수도 없었다.

고민 끝에 ‘학교생활에 건강미가 철철 넘침’이라고 쓴 기억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참 멋진 학생이라는 표현이지만, 그 녀석은 내 진심(?)을 알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도 디자인된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디자인된 말은 그 대상, 그 상황에 딱 맞는 말이면서 서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한겨울의 생각이 삐죽삐죽 고갤 내밀고

아지랑이처럼 그대 향한 그리움도 따뜻해지면 한달음에 달려가겠습니다.

그때는 서로 따뜻해져야죠 - 신병은 <입춘> 전문

 

입춘立春은 24절기의 하나로 봄이 왔다는 신호다. 입춘이 속말은 ‘풀리다. 따뜻해지다’일 것이라 보고 날씨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사이가 따뜻하게 풀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담았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따뜻해지만 다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도 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피 또한 디자인된 말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

오래전에 기억에 남아있는 커피 광고가 기억난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 이 한 잔의 커피 맥심,

오고 가는 대화가 즐겁구나 이 한 잔의 커피 맥스웰.

이런 커피 광고를 보면 지금 당장 커피를 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디자인된 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것이 디자인된 말의 힘이고 모든 사람을 공감하게 한다.

친정어머니가 아프면 가슴이 아프고 시어머니가 아프면 골치가 아프다

물론 우스갯말이지만 분명 세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공감이 가는 말이다.

디자인된 말은 다듬어진 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안겨있는 진솔한 말이다.

디자인된 말은 우선 늘 보는 모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보려는 것의 결과다.

이른 봄에 핀 제비꽃을 보며 ‘산사람도 넘기 힘든 얼음산을 맨발로 넘어 왔다’고 말하고, 나무에 매달린 매미의 허물을 바라보며 ‘이 생에서 잘한 일이 하나 있다면 고요한 견딤으로 기다릴 줄 알았던 것’이라 생각하고, ‘겨우살이’ 보며 ‘기대어 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풀꽃을 보면서 ‘오래 보고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너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벼랑에 선 소나무를 보고 귀미테를 붙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씨나락이 발아하는 것을 보며 발끝을 세우고 지나가는 빗소리도 듣고, 일렁이는 파란색 바람도 보고 농부의 발목근처에서 무수히 떴다 가는 별들도 만나는 일이다.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안도현<스며드는 것> 전문

 

이 시를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명치끝이 막힌다.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때는 운명이라 믿고 순순히 받아들여야하는 걸까. 스며든다는 게 이런 것일까.

이처럼 끊임없는 타자와의 대화이자 소통의 방식이 말의 디자인이다.

꽃의 뒤태는 뭘까? 비오는 날 은행나무 이파리는 무슨 냄새가 날까? 꽃이 핀다는 건 뭘까? 씨감자 눈뜨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감을 먹으며 씨앗이 몇 개 들어있는지 알 수 있다. 감씨 속에는 열매가 몇 개 들어 있는지를 생각해보면서, 씨앗 속에 든 우주를 예측해보는 등 별의별 생각을 다해보다 문득 이거다 싶게 대상과 말이 딱 맞아 떨어질 때 말은 디자인 되고 힘을 갖는 것이다.

말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익숙한 말들과 결별하고 익숙한 말들과의 재회다.

우리는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 수 있을까?<문정희의 아름다운 곳>를 생각해보고, 꽃이 떨어지는 순간을 보면서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고 반문해보는 것이다 <문정희의 늙은 꽃>

우리는 나이가 들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싱싱한 생각을 포기할 때 그 때 늙는 것이다.

 

신병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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