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목(眼目)
안목(眼目)
  • 남해안신문
  • 승인 2018.06.19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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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34
신병은 시인.
신병은 시인.

 

안목은 사물의 좋고 나쁨 또는 진위나 가치를 분별하는 능력 혹은 사물을 보는 관점이나 생각 혹은 사물을 보는 표정이나 태도를 뜻한다. 그리고 일정한 논리나 기준에 따라 사물의 가치와 관계를 결정하는 능력까지도 뜻한다.

칸트철학은 개념의 능력인 오성과 추리의 능력인 이성의 중간에 위치하여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포괄하여 생각하는 능력으로 정의하고 있다,

유홍준 교수는 안목을 ’미를 보는 눈’이라 정의하면서 안목이 높다는 것은 미적 가치를 감별하는 눈이 뛰어남을 뜻한다며, 안목의 높낮이가 있는 것은 미와 예술의 세계가 그만큼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창작에서 생산자도 수요자도 안목이 필요하다.

가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작품이 당대에는 평가받지 못하면서 작가의 사후에야 높이 평가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안목이 있고 없고의 문제라 본다. 예술을 보는 눈은 높아야 하고, 역사를 보는 눈은 깊어야 하며, 정치, 경제, 사회를 보는 눈은 넓어야 하고, 미래를 보는 눈은 멀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유홍준 안목>.

시 창작 또한 미를 보는 눈에 앞서 세상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문학의 미적 범주인 비장미, 숭고미, 우아미, 골계미도 결국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하는 안목의 문제다.

세상에는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이 존재한다.

'있는 것'이란 현재 작품에서 보여 지고 드러나는 것이고, '있어야 할 것'이란 그 작품이 지향하는 바나 그 작품 이면에 존재하는 일종의 전제된 메시지를 뜻한다.

우리는 이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이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가에 따라 네 개의 미를 체험하게 된다. 그 둘이 대립하면 비장미와 골계미를 느끼게 되고, 그 둘이 서로 소통하고 융합되면 우아미와 숭고미를 느끼게 된다.

예술가의 안목은 높아야 하지만,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야 할지는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달라야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삶의 진리는 고정불변이 아니라,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고려시대의 진리가 조선시대의 진리가 아니고, 조선시대의 진리 또한 오늘날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손가락질을 받았던 속요가 지금은 더 문학적 평가를 받고 있고, 원효의 불교가 더 평가를 받고, 당대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조선시대 평민문학과 김홍도의 풍속화도 당대보다는 오늘날에 더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평가가치가 변한 것은 사물을 보는 관점이나 생각 혹은 사물을 보는 표정이나 태도인 안목이 변했기 때문이다.

김홍도도 그랬고, 김정희도 그랬고, 뒤샹도 로뎅도 그랬다.

<칼레의 시민>에 안겨있는 로뎅의 안목 또한 다르지 않다.

칼레의 여섯명의 시민들.....

14세기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에게 포위당한 프랑스의 도시 칼레는 1년 동안 저항하다 결국 항목하게 된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는 칼레의 항복 사절단에게 왕은 항복의 조건으로 누군가 그동안의 반항에 책임을 질 시민 대표 6명을 선정해 주면 처형하는 것으로 시민의 목숨은 구명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광장에 모여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누가 죽으려고 자청하냐며 고민하고 있을 때,

‘내가 그 여섯 사람 중 한사람이 되겠소’ 하며 나선 사람이 바로 칼레시의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드 피에르’였다. 그리고 ‘칼레의 시민들이여 나서라, 용기를 가지고 나서라’고 설득한다. 그러자 교수형을 자처하는 시장, 상인, 법률가, 귀족 등 다섯 사람이 자청하게 된다.

그들이 칼레의 시민을 구하기 위해 속옷차림에 목에 밧줄을 걸고 교수대를 향해 무거운 발길을 옮길 때, 임신한 왕비의 간청으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형을 정지시키고 살려준다. 여섯 명의 용기와 희생정신이 바로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noblesse 오블리쥬oblige’의 시작이다.

그로부터 550년 뒤 1895년 영웅들의 기념탑 공모에 오귀스트 로뎅이 당선되어 비틀린 팔, 비탄에 빠진 얼굴, 죽음 앞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조각된다. 그러자 기념위원회에서 죄인 같은 모습이 영웅들의 모습이 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하자 로뎅은 한술 더 떠 ’받침대 위해 세우지 말고 시내 한복판 길거리에 놓이기를 원한다.

로뎅은 훗날 그의 안목에 대해 인물들을 아름답게 표현했다면 사실성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고, 높은 곳에 두었다면 영웅성을 찬양하여 진실을 잊게 했을 것이라며 창작의도를 명확히 했다. 애국주의 영웅주의 대신 사실성 속의 진실성을 선택한 로뎅, 추상적인 가치보다 희생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기념상 옆을 지나치면 그 조각의 한사람이 되어 ‘내가 그 여섯 사람 중 한사람이 되겠소’라고 외친 칼레의 ‘외스타슈드 피에르’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인이다.

보통 예술적 형식의 틀을 갖춘 작품을 두고서는 안목의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존 형식에서 벗어나 시대를 앞서가는 파격적인 작품 앞에서는 안목의 차이가 완연히 드러난다 <유홍준 안목 p12>

예술을 보는 안목 또한 평론가나 다른 사람의 안목을 참고하되 전부인양 받아들이면 예술감상의 진정성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냥 자신이 느끼는 첫 느낌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된다, 이유가 필요없이 그냥 좋으면 된다.

예술창작도 공급의 안목도 그렇고 수요의 안목도 자율이 보장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안목은 곧 시선이고 관점의 문제다.

열 명이 그 작품을 보면 열 명의 시선이 있고, 열 개의 관점이 있기 마련이다.

세상은 그래서 다양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장미’라고 하면, 사전적 의미로는 장미과(薔薇科 Rosaceae), 장미속(薔薇屬 Rosa)에 속하는 다년생 관목 또는 덩굴식물이다.

같은 장미라도 정원에 피어있는 장미와 식탁에 놓은 있는 장미가 다르고 아침 장미와 저녁장미가 다르고 햇볕이 쨍쨍한 날에 보는 장미와 비오는 날이 장미가 다르다.

뿐만 아니라 큐피터의 장미가 다르고 어린왕자의 장미가 다르다. 페르시아의 장미가 다르고 이스라엘의 장미가 다르다.

어떻게 봐도 우리 삶은 관점의 문제다. 어디서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현인들에 의하면 사람은 세가지 눈이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육안이고 다른 하나는 심안, 그리고 영안이라 한다. 여기에서 영안은 영적으로 살펴 분별할 수 있는 눈이다. 보편적으로 사람은 육안과 심안을 갖는다. 즉 눈으로만 보는 세상과 마음으로 보는 세상이다.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비말하나를 알려주는데 소중한 것은 오직 마음으로만 볼 수있다고, 그래서 소중한 거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어린왕자가 만난 오천 송이의 장미보다는 네 별에 있는 한송이이 장미가 소중하다는 것을 일러준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문에서 밝힌 안다는 것의 의미가 떠오른다.

인간은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보이고, 대상을 사랑하면 더 잘 알게 되고 또 더 잘 알면 더 잘 보게 되는 거라 했다.

이 모두가 안목의 문제다.

이렇게 보면 안목은 시선이고 시선은 관점이고 관점은 또 관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안목, 시선, 관점, 관심은 더 맑고 밝게 보는 통찰의 동의어가 된다.

창작은 관점의 문제이고 관심의 문제다.

관심은 안보이던 풍경을 보게 하고, 알지 못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게 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풍경, 새로운 의미를 만날 수 있다.

 

신병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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