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대양을 품은 해양공동체
거문도, 대양을 품은 해양공동체
  • 남해안신문
  • 승인 2018.01.04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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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종섭(사회학박사/여수일과복지연대소장/본지논설위원)

흐르는 강물처럼의 작가 놀란 맥레인은 “삶의 모든 것은 하나가 되어 흐르는 강물이 되고, 결국 세상에서 가장 큰 강인 바다를 만나 녹아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강물만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만들어온 여러 형태의 것들은 바다로 흘러가고 그리고 인간들은 그 바다와 어우러져 삶의 터전삼아 살고 있습니다.

여수하면 지리적으로 변방에 위치한 곳 입니다. 여수에서도 더 떨어진 거문도는 고립무원이거나 외딴섬으로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동도, 서도, 고도 세 섬으로 둘러싸여 호수처럼 생긴 삼호바다를 감싸고 있어 천혜의 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등장하는 초승달처럼 생긴 그런 곳으로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섬 자체보다 거문도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문도 해양공동체는 자연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협력하는 공동체 정신이 만들어낸 산물로써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거문도에 남아있고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공동체는 여러 형태로 남아있지만 세 가지를 꼭 소개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거문도라는 명칭은 구한말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붙여준 이름이라고 하는 데 ‘巨文島’ 즉 학문이 큰 섬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조선말 귤은 김 류 선생 같은 학자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후학을 양성했습니다. 그래서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역공동체가 만들어 졌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임병찬 의병장의 후학양성의 노력도거문도의 교육공동체를 확산시켰습니다.

1905년 여수에서는 최초로 세워진 근대식 학교 낙영학원(지금의 거문 서도초등학교)도 후학양성을 위한 여러 사람들의 뜻이 모아졌던 것입니다. 거문도는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학문을 통한 후학들의 양성을 위해 노력했고 그런 교육공동체가 유지됐고 지금도 그 영향을 크게 받고 있습니다.

둘째는 바다와 함께 살고 바다를 지켰던 국토의 지킴이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거문도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어서 영국군이 함부로 점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사람들답게 해양을 달렸습니다. 서쪽으로는 멀리 압록강 하구 용암포까지 진출했고 동쪽으로는 원산과 울릉도 독도까지 생활권으로 삼아서 살았습니다.

울릉도 초대 도감이 거문도 출신 오성일 이었듯이 울릉도와 독도에는 지명이나 문화, 기록, 생활 속에 거문도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독도라는 명칭에는 여수사람들이 ‘돌’을 ‘독’이라고 부르는 데 그 연유가 있다고 합니다.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우기고 있지만 독도는 이미 우리 거문도 선조들에 의해 엄연한 한국 땅임을 명칭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강치 또는 바다사자를 가르치는 가재의 이름에서 따온 가재바위, 보찰바위 등도 독도와 울릉도에 거문도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윷놀이 할 때 종지기를 사용하는 풍속도 여수와 고흥 지역의 특징인데 이것 또한 울릉도에 남아 있습니다. 삶을 위한 도전이고 먹고 살기 위해 먼 곳까지 항해를 했지만 당시 거문도 사람들은 멀리까지 항해 할 수 있는 배나 항해술은 한 두명의 힘이 아닌 거문도 사람들 모두가 참여하는 공동체 활동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거문도 해양공동체는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입증하고 대양을 건너는 항해를 통해 지혜로운 도전과 용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셋째는 사라호 태풍을 이겨낸 팔경호 이야기 입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은 한반도를 강타하면서 많은 인명피해와 물적 피해를 남겼습니다. 사라호 태풍 속에서도 거문도 사람들은 ‘팔경호’를 띄었고 공동체를 지켰습니다.

한창훈 소설가의 ‘내 술상위의 자산어보’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듯이 팔경호는 거문도 사람들이 공동으로 출자해 만든 조합을 통해 구입한 배였습니다.

추석이 오자 거문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팔 물건을 모아서 팔경호에다 실었습니다. 팔경호의 사무장의 수첩에는 팔 물건과 구입해 올 목록들이 빼꼭히 써 있었습니다.. 고흥 녹동에서 물품을 구입하고 거문도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사라호 태풍 때문에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우선 청산도로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청산도에도 사라호 태풍이 닥치자 선착장에 있었던 배들이 파손되고 물속으로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이때 팔경호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피하면 됐지만 팔경호를 살리기 위해 바다로 배를 몰았습니다.

그러면서 거문도로 가자, 이 팔경호는 거문도 사람들의 생명이나 마찬가지다. 가다 죽더라도 거문도 사람들이 그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거문도로 돌아오다 팔경호와 함께 죽었다는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대한 태풍은 집채보다 더 큰 파도를 몰고 왔고 배는 파도를 맞아 치솟았다, 내리 박히기를 반복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팔경호는 다행히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거문도로 방향을 잡았지만 사라호 태풍에 의해 멀리 밀려나갔고 그들이 도착했던 곳은 대마도였습니다.

사라호 태풍은 거문도에 큰 슬픔을 주었습니다. 죽음사람 시신도 못 찾은 경우도 있었고 그들의 장례를 치루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쓰러져버린 농작물, 파손된 배들, 무너져버린 집을 보면서도 절망했습니다.

그들의 가슴에는 ‘팔경호’ 역시 파도에 휩쓸려 파손되고 선원들도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절망속에 장례를 준비하던 중에 녹산등대 멀리서 들리는 뱃소리와 함께 팔경호가 나타났습니다. 삼호 바다로 들어섰을 때 거문도 사람들 모두는 살아 돌아온 그들을 맞았습니다.

목숨을 걸었던 선원들 그리고 그들을 기다렸던 거문도 사람들은 지금도 팔경호 이야기를 하면서 거문도 사람들이 갖는 공동체성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거문도 사람들은 지난해 촛불항쟁 때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해상시위를 했던 곳입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거문도 사람들의 의로운 행동은 지금도 계속 항해 중입니다.

*.*. 여수 우분투는 여수지역사회 공동체의 역사와 경험을 소개하면서 우리 한국사회와 지역사회가 처한 사회적 현실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정책적 함의를 찾고자 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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