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자리는 늘 보던 것이 다르게 보일 때다
시의 자리는 늘 보던 것이 다르게 보일 때다
  • 남해안신문
  • 승인 2017.10.24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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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28

간디가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의 일화다 
피터스라는 영국교수가 식민지 출신 간디가 너무 도도해서 아니꼽게 여겼다
구내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은 간디를 보며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여보게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돼지와 새가 같이 식사하는 법은 없다네’하며 비아냥거리자 
‘걱정마세요. 교수님, 그럼 제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겠습니다’라고 맞장구를 치며 비아냥을 되돌려주었다.
더 화가 난 교수는 만점을 받은 간디의 시험지에 ‘멍청이’라고 써서 돌려주었다.
그러자 다음 강의 시간에 질문이 있다면서 일어서서는  
‘교수님, 제 시험지에는 점수는 없고 교수님 서명만 있는데요’라며 그 교수에게 통쾌하게 복수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우리 삶이 결국 화법의 문제임을 일깨워준다.
상대편을 공격하되 웃음과 여유가 있는, 인간적 따뜻함이 즈며 있는 일화다. 
우리 한국인은 예부터 적을 공격하되 웃음으로 여유로 공격했다. 탈춤도 판소리도 사설시조도 그렇고 요즘의 패러디도 그렇다. 건강한 웃음이 안겨있다.

시쓰기의 주제는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할 인간적 따뜻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사람과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있다
빈 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 주려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 몸이 맨 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이었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
저 홀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
덮어준다는 저 동작 때문은 아닐까
맨 살로 벽을 더듬는 저 움막 속의 생활
다시 돌아보면
벽 뿐인 생애를 다시 또 기어서 가야하는 길이므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줄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라도 신혼방이겠다
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
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
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할 수는 없겠다
신혼 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
최선을 다하여
아침 한 나절을 몇 백년이 흘러가고 있다 -복효근 < 덮어준다는 것>

덮어준다는 의미는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이불을 끌어 덮어주는 그 행위 속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안겨있는 시다.    
개념에 대한 재발견이다. 어떻게 다르게 볼 것인가의 문제다. 창작은 대상과 현상 속에 안겨있는 또 다른 모습, 의미를 재발견해 내는 것, 대상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발견하는 것이다.
시창작도 서로 다른 것들의 관계짓기다. 
관계짓기를 하는 순간 각각 다른 의미의 존재로 거듭나고 아울러 그에 맞는 화법 또한 다시 발견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나의 집과 나의 몸을 관계 지으면 나의 몸도 수리할 곳이 많다는 걸 알게 되고, 혈관보일러도 보이고, 하수구처럼 막힌 방광도 보이고, 장마철에 젖은 벽지처럼 손보기에 너무 낡은 곳도 알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돌아보아 이 집에서 그동안 한평생을 잘 살았다는 화법도 가능해진다.

너는 물이나 커피를 담는 싸구려 용기였다. 
환경에 부담만 주는 허접한 용기였다. 

그러나 너는 다시 태어났다. 
촛불을 담는 용기로 다시 태어났다. 

아빠 손에 들린 너는 저항이었고 
엄마 손에 들린 너는 기도였으며 
아이 손에 들린 너는 희망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네 이름 앞에 
‘싸구려’나 ‘허접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  

네 이름은 용기다.             - 정철<종이컵에게>

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사람이 쓰고 사람이 읽는 이야기기다.
휴머니티다.
사람에서 시작되고 사람을 향한다고 한다.
사람과 소통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사람이야기를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람에 대한 따뜻한 고민과 사랑, 광고든 시든 에세이든 마지막으로 ‘사람’이라는 한 단어가 가슴에 남을 수 있다면 그게 좋은 글이다,
느낌이 있는 곳, 느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일이 창작의 첫걸음이다.
카피라이터 정철은 “글은 손이 아니라 눈으로 쓰는 것”이라고 한다. 
쓰려면 쓰는 시간보다는 정작 세상을 관찰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의 글쓰기의 키워드도 사람과 만남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글은 곧 사람이고, 관찰은 곧 만남인 셈이다.  
그는 공감을 무기로 말을 건네고 설득을 한다. 
그이 카피는 쓰는 게 아니라 찾는 것이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늘 쓰는 말, 우리 곁에 놓인 말 중에서 지금 내가 표현하려는 것에 딱 맞는 말을 찾는 것이다.

알밤 떨어지는 소리다
이 소리, 
한때는 꽃이었을 것이다
꽃의 표정이었을 것이다
나비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햇살의 암호였을 것이다
흙의 풍장이었을 것이다
바람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비의 파문이었을 것이다
봄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아이의 미소였을 것이다
산 깊은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새벽의 통증이었을 것이다
잘 익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홀로 써 내려간 낮은 문장일 것이다
열리고 닫히는 문이었을 것이다 
줄탁동시의 줄임말일 것이다
너를 향한 침묵의 깊이 일 것이다      - 신병은 <톡 혹은 툭, 그 너머로>

톡 혹은 툭, 알밤 떨어지는 소리에 안겨있는 의미에 대한 관찰이다. ‘톡’하는 소리가 들리기 까지의 과정을 더듬어보면 그 단음절 속에는 꽃의 표정도 보이고 햇살의 손짓도 보이고 양분을 공급한 흙의 풍장도 보이고 비의 파문이 보인다. 
뿐만이 아니라, ‘톡’에는 어미닭이 때가 되어 톡 하고 쪼아주는 줄탁동시의 줄임말이 되기도 하고, 침묵의 깊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념을 다르게 보는 것이 시적 상상력이다.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러면 그 속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모습이 보이고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시의 자리가 된다.
이질적인 것들이 부딪히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가각 다른 풍경이 태어나듯, 시는 사실과 허구 사이를 오가며 인지하는 것과 실제 존재하는 것의 틈을 확인하는 것이다. 
대상을 살펴 분해하고 조립하여 다른 생각을 하는 일이다.
그러면 늘 보아오던 낯익은 일상은 새로운 의미존재로 재발견되는 것이다.

시실 시는 다큐다. 
다만, 시는 다큐멘터리보다 그 위에 있는데 그것이 바라 상상력이다. 시는 다큐의 카메라가 놓친 10%까지 파헤친다. 즉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온전히 본다기 보다는 그 사물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관찰한다는 뜻이다.
그 10%가 시적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창의력은 의외로 평범한 일상, 낯익은 일상에서 나온다.
문제는 어떻게 다르게 볼 것인가의 문제인데 다르게 본다는 것은 개념을 다르게 읽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든 개념, 의미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시간의 개념, 사물의 개념, 너에 대한 나의 개념이 단 한순간도 같은 때가 없다. 
즉 같은 5분이라도 내가 보고 싶은 사람과 만나는 5분과 꼴보기도 싫은 사람과 마주앉아있는 5분이 다르다. 식탁에 올려져 있는 장미 한 송이와 장미원에 피어있는 장미 한 송이의 의미가 다르고, 아침에 보는 장미와 저녁에 보는 장미가 다르고, 비오는 날의 장미와 햇살 속 장미가 다르듯 사물은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파악된다.이처럼 다르게 파악되는 의미가 바로 시의 자리다.

창조는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에디톨로지고 통섭이다.
서로 관계 짓고 투사하고 소통하면서 다르게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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