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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과 긴 장마에 피폐해진 민중들 14연대에 동조
주철희 박사 4번째 여순사건 강의
군경간 마찰도 14연대 봉기 도화선
2017년 09월 25일 (월) 09:00:53 박태환 기자 seano71@nhanews.com
   
▲ 21일 해안통갤러리에서 주철희 박사의 여·순 항쟁 바로알기 제4강 ‘봉기와 항쟁’이 강의 중이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1948년 10월 19일 여수 신월동(현 한화)에 주둔중이던 14연대는 왜 총을 들었을까. 그리고 왜 이렇게 큰 항쟁으로 이어졌을까.

이와 관련해 주철희 박사는 “군인들의 봉기를 전남 동부 주민이 지지한 데는 배경이 있다”고 설명했다.

여순사건을 알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당시 민중의 상황이다.

해방 후 남한의 경제는 줄곧 위기인 상황에서 민중들의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던 이승만 정권은 민중의 생활고를 덜어 내 주는데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또 하나 당시 남한은 전 국민 77% 이상이 농사에 종사 하고 있을 만큼 핵심 산업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소위 지주들의 소유였고, 전체 농가 호수에서 소작 비율은 1913년 35%에서 1941년에는 54%까지 급증 했다. 해방당시에는 전 농민의 80% 이상이 순 소작농과 유사한 위치로 전락했다.

게다가 미군정의 미곡 수집 정책은 소작농이나 빈농에게 매우 불리했다. 미곡수집 실적을 올리기 위해 경찰과 관리의 폭압은 일제시절 보다 더 가혹해졌고 이들의 부정부패는 일제 강점기를 능가해 농민들에게는 서러움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1948년 6월부터 9월까지 세 차례 걸쳐 일어난 태풍과 긴 장마는 농사에 의지 하고 살아가고 있던 전남 동부 지역의 민중들에게 삶의 의욕마저도 잃게 했다.

여수의 경우 1948년 7월 폭풍으로 많은 벼 가마가 유실되어 식량영단은 배급 식량을 분배 하지 못 했다. 정미업자가 이윤이 박하다는 이유였다. 태풍과 장마로 인해 더 어려워진 상황에서 7월 하순부터 8월 상순까지 2기분 배분을 주지 못해 민중의 배고픔은 극에 달해 있었다.

민생고에 시달린 농민들과 도시의 궁핍한 사람들의 어려운 생활환경에 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 천가마니씩 착복하는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면서 그들을 비호한 관리와 경찰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좌. 우익 이라는 편 가르기 이념을 떠나 먹고 살기의 한 방편으로 사회주의에 눈길이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시대상이었다.

바로 이 시기 제 제14연대 군인의 봉기는 자연재해로 인한 삶의 막막함과 함께 관리와 경찰의 부패에 참다못한 지역민의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들의 봉기에 자연스럽게 동조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군경간 마찰도 이유가 됐다’고 주 박사는 설명했다. 주 박사는 “익히 알고 있듯 1945년 해방 이후 마땅히 청산됐어야 할 친일파들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서 오히려 더 큰 권력과 부를 얻고 한반도 이남을 유린했다”고 말했다.

그 예로 1947년 6월에 일어난 '영암사건'을 들었다. 주 박사는 “당시 ʻ국방경비대ʼ는 경찰의 예비 병력이므로 ʻ경찰예비대ʼ 혹은 ʻ경찰보조기관ʼ 성격이 강해서 경찰에게 무시를 당해 왔다”는 것.

영암사건이란 광주 제4연대 소속 군인이 외박을 나왔다가 영암군 신북 지서 앞에서 영암 경찰관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6명이 사망했지만 당시 경찰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던 일이다.

그 사건 외에도 1948년 9월 25일 휴가를 나온 제14연대 군인 9명이 구례에서 그곳 경찰들에게 집단 구타를 또 당한다. 상부에 조처를 요구했지만, 군인의 요구는 묵살됐다.

순천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순천, 구례, 영암 세 지역에서 일어난 군경충돌 사건을 통해 제14연대 사병들은 경찰과 무력충돌을 경험 했고,경찰에 대한 적대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주 박사는 “이런 갈등양상으로 인해 봉기를 일으켰을 때 “경찰이 쳐들어온다”는 외침은 병사들의 억눌렸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구례경찰서를 목적지로 그들을 응징하자는 결기로 응집되었으며, 그 뜻에 동조 한 군인들이 대다수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군경간의 마찰은 도화선이 됐을 뿐이다.

주 박사는 “당시 민중의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14연대 봉기가 일어났고 당시 민중들과 함께 항쟁으로 전환됐다”고 설명했다.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의 현대사 여순항쟁 바로 알기 강좌는 오는 28일 오후 7시 여수 해안통갤러리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 강좌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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