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이순신에서 벗어나야 올바른 지역 역사 연구 가능해 진다
여수, 이순신에서 벗어나야 올바른 지역 역사 연구 가능해 진다
  • 박태환 기자
  • 승인 2017.06.30 0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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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가야사 연구하는 설인택 치과원장
▲ 치과의사이면서 지역내 유일하게 고대사를 연구하는 설인택 원장. 설원장은 대학원에서 고고학을 배우기도 했다. 현재는 호남고고학회 종신회원, 국립순천대박물관 특별 연구원 그리고 대한문화재연구원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설인택 원장은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치의학 박사이면서 대학원에서 고고학을 배웠다, 

전남동부지역의 선사시대 유물과 유적지를 발굴하는 자리에는 꼬박꼬박 참여해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다.

현재는 호남고고학회 종신회원, 국립순천대박물관 특별 연구원 그리고 대한문화재연구원 이사로 활동하는 등 고고학계에서도 인정받는 치과의사다.

-.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국정과제 주문으로 가야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잊혀진 역사 가야사 복원의 의미는?

= 한국의 고대사중에서 가야사는 항상 고대국가로 발전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주변역사에 지나지 않았다. 절대적인 문헌사료의 빈곤과 삼국유사에서 일부 보이는 가락국기에서도 신라사 전개과정의 일부로 취급하고 있다.

요즘 전・후기 맹주국인 김해나 고령에서 발굴을 통한 복원이 많이 이뤄졌지만 신라나 백제의 수도인 경주, 부여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한 지원과 자료의 부족 등이 한국사에서 잊혀진 역사로 인식되는데 일조하게 됐다.

다행히 80년대 들어 지역개발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향토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서 낙동강 중상류지역과 김해, 고령, 성주, 창녕, 함안, 고성, 사천 지역 등 기존의 일반적인 가야지역으로 알고 있는 경상남북도 이외에도 전북의 남원, 임실, 장수 그리고 전남의 동부지역인 여수와 순천, 구례, 곡성에서도 가야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가야의 영역이 경상남북도와 전남동부까지 포함됐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가야사 연구의 시발점은 우리나라의 연구자가 아닌 일제강점기 때 일본관제에 길들여진 일본의 사학자들이었다. 즉 정치적 목적을 강하게 풍기는 임나일본부설을 구축하기 위해 추진된 연구가 바로 일본학자에 의해 추진된 가야사 연구다.

그 결과 가야사는 왜곡, 윤색되어 만신창이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심지어 해방이후에 가야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일제에 동조하는 듯 한 이미지로 비춰지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 시대에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할 고고학적 증거를 찾기 위해서 경상도의 옛 가야 고분들이 도굴에 가까운 수준으로 파헤쳐졌으나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는 증거품은 나오지 않았고 다만 교류의 흔적으로 보이는 일부 왜계 유물이 나왔을 뿐이다.

-. 일본은 일제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다. 임나일본부란 무엇인가?

= 임나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낙동강 서안에 자리한 가야의 여러 정치세력을 일컫는 용어로 일본부란 일본 천황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는 관부를 말한다.

즉 일제때의 조선총독부의 개념인 것이다. 결국 임나일본부는 낙동강 서안지역(우리나라 남해안)을 다스렸던 관청의 개념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기록상의 근거는 ‘일본서기’란 그들의 사서에 근거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름 아닌 369~562년까지 약 200년 동안 한반도 남부 가야지역이 일본 천황의 지배권이 미치는 식민지인 셈이다.

이들이 이런 무서운 주장을 하는 이유는 19c말 일본제국주의가 대외적 팽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지배가 정당하다는 명분을 역사속에서 찾고자 한데 있다.

이는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잔학성을 숨기려는 목적을 밑바탕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꾸준히 각종 개발에 따른 구제발굴로 가야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축적되면서 백제군사령부설, 분국설, 외교사절설 등의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진보사학자들은 이미 임나일본부설을 용도폐기된 정치적 학설로 보고 있다. 그러나 보수집단은 아직도 이 학설을 굳건히 신봉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이번 문재인 정부가 가야사의 복원은 고대로부터 일본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역사 전공자가 아닌 일반대중들도 어떤 연유로 가야사가 우리 고대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정확히 알고 외교 및 국방에서 대응책을 찾는 것도 의미 있어 보인다.

또한 가야지역이 전라도와 경상도에 걸쳐서 넓은 영역을 점유했기에 가야사의 복원이 지역통합을 이루는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도 있다.

-. 여수지역이 임나4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야의 주된 세력권은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사천・고성의 소가야, 함안의 아라가야가 있다. 이 중 전기가야연맹의 맹주국은 김해의 금관가야이며 후기가야연맹의 맹주국은 고령의 대가야다.

여수지역이 가야에 편입된 시기는 5c말~6c초이다. 이외에도 4개 가야세력을 대변하는 토기나 부장품은 여수반도 곳곳에서 발굴됐다. 해로를 통한 교역과 교류(금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와 섬진강 루트를 통한 고령의 대가야와의 교역 및 간접지배의 가능성도 보인다.

또 우리지역의 가야문화는 초기에는 가야문화가 주류를 이루다가 시간이 흐르면 백제에 밀리면서 초기에는 가야토기가 다음에는 가야와 백제토기가 혼재하고 나중에는 백제계토기만 발굴되어 시기에 따른 지배세력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여수지역이 가야사중 중요한 부분은 일본서기 계체기 6년(512년) 일본이 백제에 임나4현을 할양했다는 기록 때문이다. 이 임나4현이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로 상다리는 여수, 하다리는 돌산, 사타는 순천, 모루는 광양이다.

이는 지난 30년전 전영래 교수가 주장한 학설로 순천의 운평리 고분에서 대가야계 유물이 대거 발굴되면서 이 고장이 임나4현의 본고장임이 증명됐다. 이 같은 학설은 현재 고고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에서 임나4현의 위치는 옛 가야지역인 경상도지역이 아닌 전남동부지역으로서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임을 밝히는 중요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이런 고대사의 예민한 부분의 주된 무대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지역임을 상기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 여수지역 가야계 유물은

= 1단계로 아라가야계나 창녕토기다. 제일 이른 시기로 보인다. 장도에서 수습된 함안 고배(접시), 고락산성에서 출토된 승석문타날호로 4c 전반으로 보인다.

2단계는 소가야(고성, 사천)계 토기로 고배, 수평구연호이며 화장동, 죽포리, 고락산성에서 출토됐다. 5c전반~6c중반으로 추정된다.

3단계는 대가야(고령)토기로 미평동, 고락산성 등에서 유개장경호, 고배, 기대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죽림에서 소가야계 석곽, 고락산성에서 건물지, 집수정 등 많은 유구에서 유물이 출토된바 있다.

차후 발굴조사를 통해 이 지역의 고대사가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 이 지역에서 발굴되는 가야지역 유물에 대한 대책

= 가야와 관계된 유물뿐만 아니라 우리지역에서 발굴된 중요유물들이 타 지역에서 보게 되고 지금도 발굴되는 유물이 반출되는 것이 안타깝다.

인구30만 도시에서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우리지역을 소개할 만한 박물관이나 자료관 조차 없다는 것은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 여수가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이순신에 대한 연구는 많이 축적, 진행됐다. 또 여수와 이순신과의 관계는 너무 중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고대사나 근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이 고장 여수는 어떤 곳이었던가를 알려주는 조그만 전시관이라도 있었으면 한다.

이순신 연구에 집중되는 관심의 반의 반이라도 고대사와 근현대사에 쏟았으면 한다.

이 과정이 민간주도로는 한계가 있으며 지자체의 단체장이나 해당부서에서 확고한 역사의식을 갖는다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본다.

이 밖에 우리고장 돌산에도 가야계 또는 백제계로 추정되는 고분이 확인된다. 인근 고흥지역에서도 안동고분, 장덕고분, 야막고분에서 가야계, 백제계, 왜계 유물이 쏟아져 나왔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크나큰 업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우리지역도 영산강에서 해남반도→고흥반도→여수반도→남해→거제→일본에 이르는 항로상에 위치하며 이 지역에서 다량의 가야 및 왜계 유물이 나오고 있어서 연안항로상의 결절점이 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사실 우리지역에서도 스에키, 왜계판갑 등 일본 유물이 종종 발굴되어 당시 가야, 백제, 왜의 교류양상을 엿볼 수 있다. 언젠가 우리지역에 존재하는 고분이 발굴되어 고대 항로상에서 여수지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혀져서 엑스포를 개최한 도시에 걸맞는 문화도시로 재평가 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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