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는 백제이전 '가야의 땅'이었다
여수는 백제이전 '가야의 땅'이었다
  • 박태환 기자
  • 승인 2017.06.30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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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수보회의서 가야사 복원 국정과제 지시
여수, 4~6세기 아라가야, 소가야, 대가야 유물 출토
돌산 죽포리 조산 가야계 고분 추정 ... 사학계 관심
▲ 가야계 고분으로 추정되고 있는 돌산 죽포리 고분. 지역민들은 조산이라고 부른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1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가야사 복원을 국정과제로 검토할 것을 요청하면서 가야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여수지역 곳곳에서 아라가야와 소가야, 대가야계 유물이 출토되는 등 가야와의 연관성이 확인되고 있다. 실제 지난 2008년 죽림택지지구개발 당시 발굴된 가야계 유물은 여수가 백제이전 가야의 땅이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특히 일본이 조선 침략의 근거로 삼았던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확인해 줄 유물들이 여수를 중심으로 발굴되면서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순천과 광양에 비해 여수는 가야사에 대한 관심이 적다. 최근에야 전국 17개 시군이 참여하고 있는 ‘가야문화권 지역발전 시장・군수협의회’에 가입의사를 밝혔을 뿐이다. 지역에는 어떤 가야계 유물이 있는지 점검했다.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 전남동부서 확인

일제는 일본서기 일본이 백제에 임나4현을 할양했다는 대목을 근거로 일본 천황이 임나를 직접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조선 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임나4현을 영산강유역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2012년 순천 운평리 고분에서 대가야계 유물이 대거 발굴되면서 허구성이 확인됐다.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임나4현이 영산강이 아닌 전남동부지역이라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임나4현은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로 각각 여수와 돌산, 순천, 광양이라는 것이 한국고대사학계의 정설이다.

특히 2012년 순천 운평리 고분발굴에 앞서 지난 2008년 여수 미평동과 고락산성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대가야계 유물이 집중 발굴됐다는 점은 의미하는바가 크다.

전문가들은 “고대사의 중요한 부분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여수를 비롯한 전남동부지역이라는 것은 정설이다”며 “특히 임나일본부의 허구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따라서 가야사 복원을 위해 세심한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고 강조했다.

▲ 죽림지 택지개발 지구에서 발견된 가야계 석곽묘.

아라가야부터 대가야까지

여수지역이 가야와 연관된 시기는 4~5세기로 여수만이 아니라 전남동부지역 전역에서 발굴되고 있다.

여수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아라가야계 유물이 장도에서 함안 고배(접시)가 발굴되면서 아라가야계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 다음이 5세기 전반부터 6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소가야계 유물이 확인됐다. 소가야계 유물은 시기와 성격에 따라 전・후기로 구분이 된다.

전기로 구분되는 5세기 중엽, 소가야계 유물은 그 양이 적어 교류나 교역의 산물로 이해가 된다. 대표적으로 화장동 유적이다.

화장동 유적은 지난 1995년 순천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가 실시되면서 알려졌다. 이후 1996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이 이뤄져 비파형 동검은 물론 가야계 토기 등이 발굴됐다.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후기는 돌산 죽포리 지역에서 소가야계 묘제와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소가야의 일정 세력들이 이 곳을 중심으로 세력화한 것으로 보인다.

5세기 말 이후에는 여수 미평동과 고락산성에서 대가야계 유물이 확인된다. 특히 미평동 토기의 경우 백제토기와 대가야계 토기의 융합현상도 보여 역사적 연속성도 확인할 수 있다.

▲ 죽림지구에서 발견된 가야계 유적.

한국고대사학계 죽포리 고분 주목

한국고대사학계가 돌산 죽포리를 주목하고 있다. 이유는 이 곳에 가야계로 보이는 고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지 주민들은 조산으로 부르고 있는 곳으로 학계에서는 가야계 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고분위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고 주변은 조경석으로 감싸고 있다.

GPS광파측량기를 이용해 측량한 결과 동-서 27.3m, 남-북 24m, 높이 5.6m로 동서가 남북보다 길지만 원래 직경 28m 정도의 원형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고분이 중요한 이유는 5세기 백제와 왜 그리고 가야와 신라간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교역을 위해 새롭게 개척된 영산강에서부터 해남반도-고흥반도-여수반도-남해-거제-일본으로 이어지는 항로상의 중심에 있다.

때문에 사학계는 이 고분을 발굴하면 이 같은 궁금증이 해소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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