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블랙리스트
우리 안의 블랙리스트
  • 남해안신문
  • 승인 2017.01.2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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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난중일기> 이상훈 (여수YMCA사무총장)

‘태양으로 담뱃불을 붙일 수 없다. 그것으로 태양이 쓸모없다 하지 않는다. 예술이 그렇다.’

출처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스쳐 읽었는데 염두에 남아 문득문득 떠오르던 문구다. 태양이 한낱 담뱃불용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듯 예술이 인간 삶의 부차적인 소모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라는 점을 빗댄 것이 절묘하기도 하거니와 예술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밝혀져 현직 문화부장관 수사 뉴스가 연일 나오는 요즘엔 아예 뇌리에 박힌 말이 되었다.

광주비엔날레에 홍성담 작가의 그림이 ‘철거’되었을 때도, 시대를 비판하거나 희화화했다하여 영화제작자가 교묘한 압박에 시달릴 때도, 실력 있는 연예인이 방송국에서 잘려나갈 때도 이 블랙리스트는 작동하거나 업그레이드되었을 것이다.

명확한 증거가 없이 속만 부글부글 끓던 문화예술인들은 특검에 의해 사실이 속속 밝혀지자 발끈 들고일어났다. 이래저래 박근혜 탄핵은 더 확실해지게 되었다.

사실 블랙리스트는 비단 예술분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살벌한 정치권은 정적이라는 다른 표현으로 당연시되어 있고, 학계, 언론, 시민사회 할 것 없이 있어 왔고 작동되어 왔다.

이 리스트에 한번 오르면 획기적인 상황변화 없이는 지워지지 않는 일종의 낙인이 되어 부지불식간의 불이익은 물론 신변의 위협까지 겪게 된다. 그래서 이 리스트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이리저리 줄을 서게 된다.

공적인 영역에서 이런 비정상적인 행위가 횡행할수록 그 사회는 야만적이고 저급한 수준으로 치달아 갈 수 밖에 없다. 네 편 내편이 확연히 갈라지는데 공동체 가치가 설 수 없고,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지 않는데 정직성실만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가 없다.

의심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 하루 종일 눈치만 보며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데 무슨 행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으로서 박근혜가 저지른 셀 수 없이 많은 잘못 중에 가장 큰 잘못이 이런 사회분위기를 만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사회분위기 탓이겠지만 블랙리스트는 공적 영역, 정치권력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우리네 삶들 사이에도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 누구는 나한테 인색해서 싫고 누구는 내 단점을 알고 있어서 싫고 또 누구는 준 것 없이 밉기도 하다.

그에게 행여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은근히 배알이 꼬이고 궂은일이라도 당하면 콧노래가 나온다. 남아서 쓰레기통에 버릴지언정 그에게 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도 미운 그는 대개 나와 가까운 곳에 있게 마련이다. 멀리 떨어져 볼 일이 잦지 않으면 당연히 밉고 말고 할 것도 없을 것이나 이상하게도 서로 속을 들여다볼 정도로 가까운 이에게 왜 그리도 까닭 없는 미운 감정이 생기는지 새삼 알 수가 없다.

지난 칼럼에서 ‘우리 안의 박근혜’도 청산해야 한다고 말했던 바, ‘우리 안의 블랙리스트’도 지워 없애자는 제안을 고백삼아 한다. 공직에 있으면서 주어진 공권을 헛되이 쓴다거나 공민을 괴롭히는 자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주권자로서 심판해야 마땅하지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끼리 괜히 미워하고 경원할 이유가 없다.

박근혜 정권은 명분 없는 독재와 정치권력유지를 위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악용했지만, 그리고 그로 인해 각박해진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해서 난 짜증과 갈등의 불안을 가까운 이웃이나 가족에게 풀어 달랜다는 것은 너무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 아닌가.

정유년 새해에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할 일이 참 많다. 4년 권력 너머 반세기를 드리워온 박정희 망령을 우리 사회에서 영원히 털어내야 할 일이 가장 우선이다.

이를 위해 박근혜 탄핵은 물론이고 그 부역자들 심판과 함께 새로운 시대정신과 사회체계를 세우는 선거법과 헌법개정, 그 결과로서의 정권교체를 하는 일, 이 모든 일을 불과 반년 남짓 사이에 해내야하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해이다.

이 역사의 결과로 우리 안의 블랙리스트가 사라지고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끼리의 공동체, 따뜻한 연대가 회복된다면 정유년 올해는 행복이 시작된 한해가 될 것이다.

이상훈(여수YMCA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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