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응시, 나의 이야기이면서 너의 이야기여야 한다
시적 응시, 나의 이야기이면서 너의 이야기여야 한다
  • 남해안신문
  • 승인 2016.12.15 17: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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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19]

추상적인 생각의 관념어 하나 없이도 펄펄 살아 있는 시가 태어 날 수 있다는 것, 좋은 시는 삶의 건강함이 방금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몸을 파닥이는 시들이다.

관념어는 슬프다, 기쁘다, 즐겁다, 행복하다 등의 몸의 살아있는 느낌은 빼고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의미만 남겨놓은 것이다.

시는 무엇보다 관념어를 배제할 수 있어야 한다.

방 아랫목에 여자 둘이다

웃는데, 서로의 등짝을 때려가면서다

30분 거리 슈퍼에 가 투게더 한 통을 사서는

아이스크림에 숟가락 3개 꽂아올 때까지

웃는데, 서로의 허벅다리를 꼬집어 가면서다

순간 나 터졌어 하며 일어서는 여자 아래

콧물인 줄 알고 문질렀을 때의 코피 같은 피다

너 아직도 하냐? 징글징글도 하다 야

한 여자가 흰 양말을 벗어 쓱쓱 방바닥을 닦으며

웃는데, 피 묻은 두 짝의 그것을 돌돌 말아가면서다

친구다 - 김민정 <민정엄마, 학이 엄마>

일상적 웃음이 있는 풍경이 그대로 그려진 시다. ‘나 터졌어’ 하며 일어서는 여자 아래 놓인 붉은 피! 이처럼 시는 실제 눈앞에 펼쳐지는 혹은 펼쳐질 수도 있는 내 이야기이면서도 너의 이야기이어야 한다. 즉 대상을 통해 내가 이해한 삶의 이치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상황, 하나의 대상을 통해 우리 삶을 공감으로 그려내는 솜씨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파블로 네루다가 어느 날 길을 가는 자신을 시가 불러 세웠다고 말했듯이 시는 한순간에 만난 삶의 체험에서 비롯된 내면의 울림이다.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찾아왔다. 그건 목소리도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고 침묵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잘 보이고, 나를 들어 올리고 통과하곤 했다. 그게 시라고 일러주었다”고 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순간에 만난 시적 인식의 순간을 그대로 그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세상은 이야기 구조로 되어있다. 이야기는 인간의 존재 조건이며, 인간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이야기하기 위해서 산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이야기를 하더라도 좀 더 건강한 이야기를 좀 하자,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 따뜻해지면 좋겠다.

시창작도 알고 보면 세상과의 소통이다.

인문과 자연 할 것 없이 모든 영역과 다 소통하는 통섭의 개념이다.

서로 상반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꽤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도리어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다른 속성을 지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 다른 모든 것들이 다름 속에 닮아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앗이 된다.

오래 익숙한 세상과의 새로운 조우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의외로 사소한 차이와 다름에서 가능하고 작은 비밀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먼저 와 기다리던 선재가
내가 멘 책가방 지퍼가 열렸다며 닫아 주었다.

아무도 없는 집 썰렁한 내 방까지
붕어빵 냄새가 따라왔다.

학교에서 받은 우유 꺼내려 가방을 여는데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종이봉투에
붕어가 다섯 마리

내 열여섯 세상에
가장 따뜻했던 저녁              -복효근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시는 현상과 대상에 켜켜이 쌓여있는 새로운 이야기, 숨어있는 이야기를 발견하여 풀어내는 것이다. 그 속에 안긴 인간적인 면모와 만날 때 감동과 떨림이 전해진다.

이 감동과 떨림이 시를 완성하는 마침표가 될 것이다.

시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의 아랫목 같아야 한다.

그런데 오랜 역사 속에서 말을 해왔고, 표현법도 많이 발전을 해왔는데도 감정을 드러내는 말들은 참으로 제한적이다.

처음 듣는 새 소리,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노래나 연주, 말로 그 느낌이나 감동을 실제 체험하는 것처럼 설명할 수 없다. 좋아하던 애인의 손을 처음 만졌을 때의 촉감이며 감정이나 그 생생한 느낌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날 것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느낌들을 어떻게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시는 표현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어느 시인은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꾀하지 않는 언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가장 원시적인 감각을 언어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는 시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문제는 언어에 담겨지지 않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어떻게 산 채로 언어에 담을 수 있을까? 그것은 가능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언어 대신 사물이나 사건, 장면 등을 사용하는 것이라면 그 방법은 뭘까?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게 하는 방법이다.

즉 이미지화 하는 방법이다.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은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 상관물(客觀的相關物)을 찾는 것이다. 즉, 개인의 정서의 외형이 되는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들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의 감각 경험과 관련 있는 외부 경험이 주어졌을 때, 정서가 즉각적으로 환기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감정이나 정서는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고 언어에 잘 담기지 않으니까, 그것과 외부적으로 유사한 상관물(사물, 사건, 장면)을 찾아서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 자신의 체험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자신의 경험,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통해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의 완성은 시인이 아니라 독자라고 하는 것이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볍씨를 담갔다. 바람 한 잎과 구름을 벗겨낸 햇살도 꺾어 넣었다. 봄 논의 개구리 울음도 잡아다 넣었더니 비로소 항아리가 꽉 찼다.

나흘 밤의 고요가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항아리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저 경건한 나흘, 지나가는 빗소리도 발끝을 세우고 갔으며 파란색 바람이 일렁이다 갔으며 또한 파란 별들이 농부의 발목 근처에서 무수히 떴다 갔다.

항아리 속에서 적막의 힘이 차오른다. 씨앗들이 뿜어내는 발아의 열, 항아리가 드디어 익어가기 시작한다. 촉촉이 스며든 물기에 몸을 여는 씨앗들, 부드러워진 껍질을 걷어내며 깊은 잠에서 눈을 떴다. 귀가 열리고 부리가 생겼다. 몸속에 숨겨둔 하얀 발을 내밀었다. 흙이 묻지 않은 순결한 발들, 뿔을 달고 푸른 들판으로 달려가고 싶은,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며 도란거리는 그들 모습을 보고 나는 씨나락 경전을 듣는다.

적막은 발아의 요람

작은 항아리 속에서 거대한 우주가 발아하고 있다.  -김우진 <농림6호>

‘농림6호’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상이 발현된 시이기에 체득한 비유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생명의 움틈을 세밀하고 애정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자연의 신성을 발견해내는 통찰이 깊다. 이런 시가 좋은 시이고 너의 이야기이면서 나의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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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2016-12-20 13:36:01
지인의 소개로 남해안 신문을 접하고 기사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19회를 읽게 되었습니다. 1회부터 차근차근 읽어보고 싶어 061-692-2100 번호로 전화드렸으나 받지 않으셔서 부득이 메일 드립니다. 1~18회 메일송부 꼭 좀 부탁드립니다 -통도사성보박물관 이춘선(koorak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