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지혜>모두 똑같은 운명이다
<성서의 지혜>모두 똑같은 운명이다
  • 남해안신문
  • 승인 2012.03.0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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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전도서 2:12b-17

맞다. 하지만

▲ 정병진 목사
코헬렛은 12b에서 이미 17절에 언급한 바 있는 지혜, 광기, 어리석음 따위의 주제를 다시 떠올린다. 그는 한평생 지혜를 얻고자 힘쓴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세상 누구보다 지혜와 지식 쌓는 일을 많이 경험했다고 자부할 정도에 이르렀다(1:16).

성서 지혜문학에서 지혜는 인간이 구할 수 있는 지상 최고의 보물로 자주 칭송되곤 한다. 전통 히브리 현자들은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이나 황금을 얻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고 가르쳤다.

지혜를 얻으면 부귀영화, 장수, 평안이 덤으로 그냥 다 따라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잠 3:16-17). 히브리 현자들에게 하나님은 ‘지혜’로 세상의 기초를 놓으셨고, 지혜의 근원이었다(잠 3:19; 집 1:5).

심지어 지혜는 가장 먼저 창조되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한 인격체로 묘사되기도 한다(잠 8:22-231; 집 1:1, 4).

그러니 사람이 이처럼 귀중한 지혜를 얻고자 자신의 한평생을 바친다고 해도 존경은 받지 못할망정 그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코헬렛은 옛 현자들이 가르쳐온 그 지혜의 길을 따랐다. 지혜가 주는 유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그는 “지혜자는 제 앞을 볼 줄 알지만, 우매자는 무지의 흑암 속에서 헤맨다는 사실을 자신도 익히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지혜에 대한 기존 통념에 수정을 가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13-14절을 ‘맞다. 하지만’ 구조로 본다. 말하자면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우월한 것은 맞지만, 지혜자나 우매자 모두 죽어야할 운명(미크레-몫, 운명)이라는 논리구조를 보인다는 것이다.

지혜자나 우매자가 모두 죽어야할 운명일진대,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크게 더 나을 것도 없다는 것이 코헬렛의 주장이었다. 그는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분명 더 낫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코헬렛은 지혜를 얻으면 부귀영화나 장수가 저절로 따라온다는 전통적인 가르침은 부분적으로만 맞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고 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도 많았다(1:18). 코헬렛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많은 지혜를 쌓았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는 지혜 자체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는 현실을 경험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공들여 축적한 지혜가 아무리 많다고 한들 그것이 언제까지나 통하는 만고불변의 진리도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보면 지혜자나 우매자나 때가 되면 똑같이 죽어야 하는 덧없는 인생에 지나지 않았다.

동일한 운명
코헬렛은 지혜자와 우매자가 끝내 동일한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놓고 깊은 사색에 빠진다. 자신도 우매자와 똑같이 죽을 운명이라 생각하니 그동안 지혜를 얻고자 갖은 노력을 다 했던 일들이 모두 무의미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는 끝내 “지혜를 얻고자 힘쓰는 것도 헛되다”는 결론을 내린다. 코헬렛은 지혜를 얻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최고 목표라고 여기고 한평생 부지런히 지혜를 추구해왔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전승된 현자들의 모든 지혜를 수집했고, 자신이 직접 사물의 원리를 관찰하고 연구하기도 해서 새로운 지혜를 얻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이만하면 천하에서 자신만큼 지혜로운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자부해도 될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엄청난 지혜를 축적하면서도 그 한계 또한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헬렛은 지혜를 얻으면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마저도 극복하고 마침내는 영생할 줄 알았던 것 같다.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조금 더 오래 살 수는 있지만 그래봐야 도토리 키 재기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드시 지혜자가 더 오래 산다는 보장도 없었다.

지혜자나 우매자 모두 죽기는 매 한가지였던 것이다. 이것이 코헬렛을 크게 실망시켰다. 사실 지혜자, 우매자, 짐승까지도 죽음 앞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지혜를 얻고자 그토록 애써야 하는지 깊은 회의가 몰려왔다.

모두 잊힌다.
코헬렛은 지혜자나 우매자 모두 똑같이 끝내 망각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1장 11절에서 이미 나왔던 주제의 변주다. 지혜자나 우매자 할 것 없이, 모든 세대는 다가올 세대에게 정한 때가 되면 자리를 내줘야하고 서서히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코헬렛은 여기서 인습적 지혜가 가르쳐온 주장을 바꾸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그동안 현자들은 “의인은 칭찬받으며 기억되지만, 악인은 그 이름마저 기억에서 사라진다”(잠 10:7)고 가르쳤다.

그러나 코헬렛이 연구해본 결과 이는 사실과 달랐다. 그는 어떤 의인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성읍을 구해냈음에도 ‘가난하였기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쉽게 잊히는 것을 보았다(9:13-16). 코헬렛이 무엇보다 납득하기 힘들었던 사실은 지혜자나 우매자의 차이를 없애버리는 ‘죽음’에 있었다.

그는 죽음과 망각이 지배하는 현실을 보면서 인생의 덧없음을 깊이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헬렛이 줄곧 추구해온 것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있었다. 그는 세상의 지식, 권력, 재물, 쾌락, 건축, 농사 등 인간이 최고로 여기는 것이라면 거의 대부분 성취해보았다고 하였다.

그러고도 인생의 갈증은 좀체 해소되지 않았다. 그 모든 게 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헛수고임을 깨달았을 뿐이다. 이런 삶의 공허로 인해 사는 것 자체가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우리말 ‘사람’이란 단어는 ‘살다’와 ‘알다’에서 줄기만 떼어 만들어낸 낱말이라고 한다. 즉 삶과 앎이 어우러진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삶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사람으로서 제 구실을 감당할 수 있는가보다. 우린 참 사람으로 살고자, 어떤 삶이 가장 값지고 보람 있는지, 또 어떤 삶이 안개처럼 허망한 것인지를 깨달아야만 한다.

정병진 목사(여수 솔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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