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페스토의 실종
매니페스토의 실종
  • 이상율 기자
  • 승인 2008.03.3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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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율의 세상보기]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주례 앞에 서 서로 실천하기 쉬운 약속을 한다. 신랑은 1. 청소·설거지 등 집안일을 책임지겠다. 2. 비자금을 절대 만들지 않겠다. 3. 한 달에 한 번은 공연관람 등 문화생활을 하겠다. 4. 운동을 열심히 해 뱃살을 빼겠다. 등을 약속하고 신부는 1. 지금의 예쁜 모습을 잘 관리해 남편이 한눈팔지 못하게 하겠다. 2. 재테크에 온 힘을 다하겠다. 3. 집을 잘 가꿔 남편이 일찍 귀가하게 하겠다. 4. 쓰레기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겠다. 등이다. 배우자들이 구체적인 약속을 하고 식장에서 다짐하는 것을 매니페스토 결혼 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2007년 첫 선례가 생겼다. 가정은 사회의 기초 조직이며 사소한 약속을 지키는 덕으로부터 부부의 믿음이 싹트는 것이기 때문에 매니페스토 결혼은 매우 의미 있는 시도로 보인다.

매니페스토(Manifesto)의 어원은 라틴어의 매니페스투스(manifestus)라고 한다. 즉 증거 또는 증거물이란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이 용어가 정치인에게 사용되는 것은 매니페스토란 자신의 과거 행적을 솔직히 고백하고 앞으로의 구체적 실천 계획을 공적으로 밝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당 저당을 기웃거린 정치인은 그 불가피한 이유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앞으로 그렇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어떤 비리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으면 그 경위를 밝히고 앞으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고백을 하고 정치인으로서의 앞으로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공약하는 것을 말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선거 이후에는 주기적으로 당선자의 약속이행 여부를 스스로 발표하게 하고 유권자들과 함께 꼼꼼히 따져보며 다음 선거에서 선택의 기준을 삼도록 해야 한다.

매니페스토 운동이 활성화되면 과거 슬금슬금 넘어가는 정치권의 구태와 선심성 공약, 애매모호한 빌 공자 공약(空約)은 불가능해 진다. 공약은 후보가 생각하는 비전과 중단기 추진전략을 목표, 우선순위, 절차, 기한, 재원, 등을 밝히게 되고 문서로 만들어진 공약집 발표가 꼭 필요해져 알뜰한 정책과 성실한 의정 활동을 가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006년 지방선거 때 처음 시작한 매니페스토는 2007년 대선에서 절반의 성공에 그쳤지만 이번 4.9 총선에서는 실종되고 말았다. 대통령 선거에 이어 총선이 시행됨으로써 각 당의 공천자 결정이 늦어지면서 발생한 것이기는 하지만 역설적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할 인물들이 자신의 공약조차도 만들지 못한 체 정치에 나서게 된 것이다. 아직도 후진정치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선 공천심사 때부터 신청자들이 일종의 의정활동 계획서인 매니페스토 계획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그것을 공천심사 자료로 삼아야 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공천 기준에 영향을 주었다면 그나마라도 국민의 신뢰를 다소라도 얻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 때문이다. 결국,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증폭되고 전체유권자의 절반도 못 되는 반쪽짜리 당선자가 속출할 것으로 생각하면 18대 국회의 구성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만천하에 증명하게 될 것이 뻔하다.

여수지역에 출마한 후보자도 매니패스토 선거는 치루지 못하게 되었다. 후보로 나선 전직 의원이 기자 회견을 통해 대표공약을 발표하긴 했지만 유권자가 선택의 자료로 사용하기에는 미흡하다. 그러나 4.9총선이 끝나면 국회 등정에 앞서 유권자들에게 더욱 자세한 자신의 공약을 공개하는 절차를 거쳤으면 한다. 이는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를 확보하는데 크게 영향을 주게 되며 정치발전에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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