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그렇더군요> 불량 인간들
<그게 그렇더군요> 불량 인간들
  • 남해안신문
  • 승인 2007.06.20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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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수/전남대(여수)문화관광콘텐츠학부 외래교수
나는 산을 좋아한다. 주일에는 두 번 정도 가까운 산을 오르고 주말에는 2주 꼴로 5시간 이상의 산행을 하는 것을 일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동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가운데도 선배 되는 L씨와는 몇 년째 같이 산행하고 있다. 그 양반과 산을 가면 편하다. 너무 순수하다. 꼭 달짝지근한 매화주를 가져와 나눠 마신다. 그래 주위에서는 둘은 애인사이라고 말한다.

며칠 전 어느 일요일, 이 날도 2시간쯤 걸었을까. 쉬어가려고 물을 꺼내는 데 이 양반이 허허롭게 웃으며 들려주는 얘기에 화가 얼마나 났는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들려주는 얘기는 대강 이렇다.

정부투자기관에서 퇴직한 L씨는 퇴직자 모임에 자주 나가지를 않는다고 했다. 열심히 산에 다니고 자식들(약사․교사) 잘 되는 것 보며 유쾌하게 산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후배한테서 전화가 왔단다. “선배님, 상조회 회장을 맡아 주십시오. 여느 모로 보더라도 선배님 같은 분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니 상조회에 자주 나가지도 않는 사람이 회장을 하다니 그건 안 되네.”“상조회에서 전권을 저에게 맡겼습니다. 선배님만 허락하면 됩니다. 내일까지 생각하셔서 연락 주십시오.”

전화를 받고 L씨는 과제를 만났다 싶었단다. 그러면서 시간도 있고 산악회 회장을 한 적도 있어 ‘그럼 한번 해볼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쪽에서 말한 다음 날 오전에 후배한테 전화를 걸었단다. “나 같은 사람이 회장을 해도 되는 것인가? 모임에 성의도 없는 사람이...” 거듭 사양을 했으나 후배는 진실로 맡아주기를 바라는 정황인 듯 보여 “그럼 그렇게 하지” 했단다. 그러자 후배는 그날 당장 점심을 하자고 했다. 그래 L씨는 오늘은 안 되고 월요일에 연락해서 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월요일 오전 집에서 신문을 뒤적이다가 어느 새 11시가 훌쩍 지나 전화가 오겠지 하고 있는데 11시50분이 되고 말았다. 이상하다 싶어 L씨가 전화를 넣었단다. 두 번의 긴 신호가 가는데도 받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 직전 회장한테 전화를 했더니 “회장을 S씨가 하기로 했는데...”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L씨는 후배가 그래서 전화를 받지 않았구나. 그럼 자기가 말한 전권을 일임 받았다는 말은 무엇이지.

순간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어 후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단다. 그러나 그는 전화를 끝내 받지도 않고 해주도 않았다. 적어도 사정이라도 듣고 싶어 했는데. 너무 황당하다 했다. 그런데 L씨의 다음 말이 나를 화내게 만들고 말았다.

후배가 그 모임에 가서 “그 양반이 뭐 그리 자리 욕심이 많은지”, 심지어 “모임에 잘 나오지도 않으면서 회장은 하고 싶어가지고” 라고 하면 내 꼴이 뭐가 되느냐는 푸념이었다. 후배는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라는 것이다. 창피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본인이 회장을 한다고 한 것도 아니고 맡아주면 모임이 더 빛난다고까지 말한 사람이...L씨의 허허로운 웃음은 그날 산행 내내 나를 짓눌렀다.

매스컴 효과이론에는 ‘제3자 효과(third-person effect)’라는 것이 있다. 얼마 전 <연예인 x파일>이 있었을 때 가장 관심과 영향을 받은 사람은 당사자들 보다는 제3자 즉, 시청자들이라는 개념이다. 지금 L씨가 걱정하는 것도 자기에게 회장을 제안한 후배나 본인보다는 다른 회원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겠느냐는 부끄러움,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과 일과 부딪친다. 그러나 인간관계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 적당히 속이고 순간을 모면하고 자기 편의대로 한다면 우리 사회는 불신과 원망 말고 뭐가 남을까. 우리는 선량 인간은 못돼도 ‘불량 인간’은 되지 말아야 한다. 순진무구한 L씨에게 후배는 정중히 사과해야 한다. 그나마 인간이라면.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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