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여순사건으로 승화돼야
6월항쟁, 여순사건으로 승화돼야
  • 남해안신문
  • 승인 2007.05.30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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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난중일기] 한창진 <논설위원, 6월민주항쟁20년사업위원회 상임대표>

올해로 20주년이 되는 “6.10민주항쟁기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우리 지역에서도 6월 8일부터 기념식을 비롯하여 토론회, 체험마당, 걸개그림 전시회, 자료집 발간, 전야제, 대한민국 하나로 잇기 등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6월 항쟁 기념행사가 서울을 비롯하여 20 여 곳, 전남에서는 목포와 여수 2곳에서 열린다. 이렇게 당당하게 행사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가슴 벅차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

이번 5․18 행사의 구호를 “참여 해요 5.18, 함께 해요 6.10”로 정한 것은 ‘6월민주항쟁’은 ‘5.18민중항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매년 5.18이 돌아오면 우리 여수시민은 할 말을 잊는다. 그것은 군부의 온갖 언론 보도 통제에도 불구하고, 5월 18일에 발발한 민중항쟁의 소식은 전남일원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18일 오후와 19일에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행해진 무자비한 계엄군의 살상행위를 지켜본 시외버스 승객들에 의해 퍼져나갔다. 또 시위대중 일부가 아시아자동차 트럭을 타고서 도내 각 지역에 직접 알리고 응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화순, 나주,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목포, 가까운 순천까지 확산되었다. 그러나 신풍검문소를 지킨 군인들 때문에 여수는 전혀 호응하지 못하고, 몰래 가슴 조이면서 지켜보기만 했다. 기껏 뒤늦게 헌혈증서와 기금 모으기 등 후속적인 행사에 동참하는 정도였다.

그런 여수도 일어선 것이 바로 ‘6월민주항쟁’이다. 1987년 6월 26일 전국적으로 열기로 한 국민평화대행진을 여수, 광주, 전주 등 7개 도시는 6월 23일에 앞당겨 강행하였다. 여수는 교동오거리 한길화랑 앞에서 규탄집회를 갖고, 중앙동 물량장을 거쳐 시가행진을 하면서 참가자가 1000명 가까이 늘어나면서 시위대가 진남관에 집결하였을 때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대었다. 성직자와 민주 청년, 학생, 노동단체 회원들이 나선 것이었다.

이 날 이후로 여수는 40년 가까이 금기시해왔던 거리 시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광주와 비슷하였다. 토벌군이 여수 탈환을 위해서 10월 24일부터 27일까지 해상에서 박격포 사격으로 시가지는 불바다가 되었다.

진압 이후 거대한 보복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많은 사람이 반란 연루 혐의를 뒤집어써 희생되었다. 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강제로 가입시킨 ‘국민보도연맹’을 내세워 집단 학살을 하였다. 최근까지 연좌제로 인해 온갖 고통을 받아야 했던 지역민들은 “여수에 인물이 없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피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런 여수에서 5.18을 받아들이기에는 벅찼지만, 같은 전라도 사람으로서 그 때 광주시민에게 진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함께 한 것이 여수에서 ‘6월민주항쟁’이다. 가슴조이면서 몰래 5월 정신을 기려온 결과이다.

이렇게 억눌렸던 진리와 정의의 신념을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하여 민족민주주의 운동에서 전남대의 학생운동, 민주주의청년회의 청년운동, 민주주의노동자연합의 노동운동, 전교조의 교육운동 등이 활성화되었다. 90년대 이후 시민사회 역시 역동적인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인정하는 시민운동단체로 성장한다.

이제 우리는 돌아오는 10.19여순사건 59주년을, 5.18, 6.10과 같은 연장선에서 행사를 준비하여야 하겠다. 이 일에 무엇보다도 여수시와 여수시의회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라도 찾아서 여수의 정신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역 정체성을 살리고, 시민을 화합시키는 중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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