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烽燧), 근세 이전의 핫라인
봉수(烽燧), 근세 이전의 핫라인
  • 오문수 시민기자
  • 승인 2006.11.25 11:3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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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설치되기 전까지 봉수는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수단이었다
▲ 백야곶 봉수의 모습. 두 곳의 봉수대 옆에는 어김없이 산불감시소와 묘가 있었다. 조상들의 안목을 빌린걸까?
봉수제도란 산정에 봉수대(烽燧臺)를 두고 밤에는 봉(烽:횃불), 낮에는 수(燧:연기)로 변경의 정세를 중앙의 병조와 지방의 각 읍과 군진에 급히 전달하는 군사통신 조직이다. 그러므로 봉화제도, 봉화대라고 부르는 것보다 봉수제도, 봉수대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특히, 봉수는 변방의 위급상태를 군대에 알리는 기능뿐만 아니라, 평시 1홰의 봉수 신호는 아무 일도 없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근대의 통신시설인 전화기가 설치된 1894년 이전까지는 백성들의 생업안정에도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서로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산꼭대기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서로 연락을 취하는 통신 방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주나라시대 부터 시작하여 당나라시대에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가락국의 김수로왕시절에 봉화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봉수제도를 확립한 왕은 세종으로 관계규칙과 봉수선로, 거화법 및 봉화군(烽火軍) 근무수칙을 정비하였다. 조선 초기에 전국적인 봉수 조직이 편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봉화군의 고역, 근무태만, 보급부족, 비, 구름, 안개로 인한 판단곤란과 중도 단절 등으로 여의치가 않았다. 따라서 숙종 이후에는 봉수와 파발을 함께 운영하였다.

조선시대 봉수는 직봉(直線烽燧)과 간봉(間線烽燧)으로 구분되는데, 직봉은 기간선로상의 것이고, 간봉은 보조선이다. 조선시대의 봉수망은 5대 직봉이 있었다.

제1로: 함경도 경흥(서수라) → 강원도 → 한성의 목멱산(지금의 남산)
제2로: 경상도 동래(다대포) → 충청도 → 한성의 목멱산(지금의 남산)
제3로: 평안도 강계(만포진) → 황해도 → 한성의 목멱산(지금의 남산)
제4로: 평안도 의주(고정주) → 황해안 → 한성의 목멱산(지금의 남산)
제5로: 전라도 여수(돌산도) → 충청도 → 한성의 목멱산(지금의 남산)

조선의 봉수는 설치지역에 따라 구분되었는데,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인 서울 목멱산의 경봉수(京烽燧)와, 해안이나 변경의 제1선에 위치하여 연대라고 부르는 연변봉수(沿邊烽燧),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로 구분한다.

이외에도 조선후기 서양 이양선과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연변 지역에 군사적으로 중요시 하였던 진영에서 자체적으로 설치하여 본읍 또는 진영으로만 연락하도록 운영되었던 권설봉수(權設烽燧)가 있다.

봉수의 신호방식은 평시에는 아무 일도 없다는 의미로 1개의 홰를, 적이 나타나면 2홰, 경계에 접근하면 3홰, 경계를 범하면 4홰, 접전하면 5홰를 올렸다. 악천후로 전달되지 않을 경우 화포나, 각성(角聲), 기를 사용해 12시간 내에 남산 봉수대에 도착하도록 하였다.

▲ 조선시대의 봉수망으로 굵은선이 5대 직봉로이다
조선시대에 여수지역은 일본과 인접해 있는 최전선이다. 또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전라좌수영 본영이 있었던 역사적인 지역이다. 따라서 여수지역에는 적의 침입을 관망하는 장소로 연대(烟臺)와 요망소 및 봉수대가 여러 곳이 있었다고 한다.

난중일기에는 ‘임진년(1592년: 임란 발발 1년전) 2월 4일. 맑음...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마치고 북봉(종고산)의 연대 쌓은 곳에 올라가보니 축대 쌓은 위치가 적당하여 절대로 무너질리 없었다. 이봉수가 부지런히 일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구경하다 해질 무렵에 내려와서 해자 구덩이를 살펴보았다’라는 기록이 있어 유사시에 대비하는 장군의 예지를 짐작할 수 있다.

기자는 직봉 제5로의 출발선인 여수시 돌산읍 둔전리 봉화산 정상(해발 381m)에 위치한 돌산 봉수를 찾았다. 3번의 시도 끝에 찾은 봉수는 많이 허물어져 원형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봉수대에 올라가보니 여기가 왜 출발점이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정상에서 빙 둘러본 전망은 여수 전역을 조망할 수 있었다. 수많은 아름다운 섬들과 원양에서 내해로 접근해오는 선박들의 모든 동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봉수대는 2단으로된 돌무더기가 나선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단은 약 9m이고 상단은 지름이 3m 정도이다.

봉수대 약5m 떨어진 지름 1m쯤 되는 자연석위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다. 물이 고여 있지만 형태가 너무나 둥근 형태다. 하지만 돌산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2번째 임무를 부여받은 백야곶 봉수로 가기위해서, 산을 내려가기로 마음먹고 약 1㎞쯤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도중에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껏 취재를 하면서 “저걸 찍을까?” 하다가 그냥 무시하고 왔던 사진들이 기사화되고 나서 크게 후회한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정상으로 올라가 물이 고인 상태로 촬영하고 난 후 물을 퍼내고 사진을 촬영했다.

“오!” 놀라운 광경이었다.

손바닥으로 덮으니 꼭 맞았다. 상단부의 넓이는 지름이 약 15㎝이고 깊이는 10㎝쯤이다. “이건 무슨 용도일까? 봉군들이 사용했던 지표석이나, 주술적 의미?”

뭔가를 고정시킬 용도로 나무를 박아 세우기에는 너무 얕고 원추형이라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다. 아무리 궁리해도 감이 잡히질 않는다. 봉수대 지킴이로 여수시민협 회원인 백형선씨에게 확인한 바로는 ‘학독’이란다.

‘학독’은 원래 '확돌'이다. '확'은 지금도 전라도 지방에서 방언으로 쓰는데, 나무나 돌을 움푹파서, 그곳에 고추를 넣고 찧거나 하는 도구를 말한다. 움푹 들어간 곳을 '확'이라고 하며, '독'은 '돌'의 방언이다. 지금도 남부방언에서는 '돌'을 '독'이라고 한다.

‘학독’은 과거에는 어느 집에나 한 개씩은 다 있던 물건이다. 하지만 보통 지름이 50㎝ 정도에 높이가 1m정도이지 이렇게 작은 학독은 본적이 없다. 백씨는 고증은 안됐지만 전국에 유일무이 할 거란다. 자연석위에 이만한 크기의 학독을 보신분의 제보를 받고 싶다.

원래 봉수주위에는 봉수를 24시간 지키며, 상황 보고를 담당할 봉군(烽軍)이 10여명 상주한다. 봉수군에는 봉수대를 책임지는 오장(伍長)이 10여명의 부하를 관리 감독하는데 반드시 인근 주민을 차출하였다. 이들은 일이 고달프고 기후관계로 고생하기 때문에 천민출신이었다.

이들이 봉수대 주위에서 상주한 흔적은 전투용으로 사용된 수마석(水磨石), 백자 청자 등의 그릇파편과, 우물, 봉전(봉군들이 지었던 밭), 주거건물의 기단, 방호벽에서 볼 수 있다.

돌산봉수 바로 아랫동네의 지명은 둔전이다. 둔전(屯田)은 말 그대로 군대가 주둔하면서 평시에는 농사를 짓고, 전시에는 싸움터에 나간다. 알려진 바로는 여수지역에 봉화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묘도, 만흥동, 돌산, 백야곶, 개도, 손죽도의 6곳이나 된다.

▲ 돌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여수 모습
봉화대가 있는 산을 봉화산, 망산(망보는 산), 우산(牛山: 소의 눈처럼 크게 뜨고 보라는 의미), 상산(上山: 높은 산)이라 부른다. 또한 봉수와 관련된 마을 이름도 봉림, 봉수, 봉덕, 봉두, 봉전, 봉오 등이 있어 여수는 최전방 요새였음을 알 수 있다.

세계적 역사학자인 카아(EH.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한반도 지도를 세워놓고 보면 부산은 통영보다 오른쪽에 있고, 여수는 해남보다 우측에 위치한다. 그럼에도 부산을 경상좌수영, 통영을 경상우수영, 여수를 전라좌수영, 해남을 전라우수영이라 부른 것은 당시 모든 중심은 왕이어서,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 좌측이 되기 때문이다.

흥분된 마음으로 돌산 봉수대를 내려오니 철모르는 도라지와 돌산갓 꽃이 한참이다. 지금이 어느땐가. 원래 갓은 4~6월이, 도라지는 7~8월이 개화기다. 올해는 돌산갓이 값이 형편없이 떨어져 농민들이 수확을 안하고 포기하자 꽃이 피었고, 봄처럼 따뜻한 날씨에 도라지가 철을 잊었다.

오후 5시 넘어 도착한 백야곶 봉수에서 바라본 전망은 다시한번 감탄케 한다. 멀리 백야도를 잇는 다리와 점점이 보이는 섬들. 정말 아름다운 국토다.

아스라이 제5로의 세번째 봉수대인 고흥 팔영산이 보였지만 훗날을 기약기로하고 산을 내려왔다. 봉수대 두 곳의 사진을 촬영하는 데 눈에 거슬리는 것은 두 군데 다 묘가 있었다. 봉군이 전사하여 묻힌 묘인가 하고 확인해 봤지만 민간인들이 명당을 잡아 묘터를 잡은 것 같다. 요즘의 명당은 자손들이 손쉽게 접근하기 쉬운 곳이 명당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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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구넷 2006-12-31 12:16:15
사하구지역 포탈사이트 "사하구넷" 운영자 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겨울철
집에서 못쓰는 피자 또는 음식 쿠폰을 좋은 일에 쓰세요^^
피자나,통닭같은것을 시키면 박스 한쪽 귀퉁이에 쿠폰이 붙어 있습니다.
10장을 모으면 피자를 1판 더 주든지 통닭같은것을 하나 더 줍니다,
1년동안 피자나 통닭을 10개 시켜먹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버려 왔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모아서 피자나 통닭으로 바꾸면 어떨까?하구요...ㅋㅋ

제가 먹을 것은 아니고 사하구의 어려운 아이들이 먹을 것이랍니다.
혹시 집에 못쓰는 피자 쿠폰이나 기타 등등의 쿠폰 있으시면 아래의 주소로 보내주세요.
한장한장 소중이 모아서, 날도 추운대, 힘들어할 사하구 아이들을 위해서 쓰겠습니다,


부산시 사하구 장림2동 60-34 신도@상가2층 사하구넷
전화:051)265-3798, fax:051)265-3795


자세한문의는 http://sahagu.net/main/bbs/tb.php/10/116
로 오셔서 댔글남겨주셔도 됨니다,

봉수대 2006-11-30 13:47:28
오문수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봉수에 대해서 그리고 최 전방이었던 여수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잔잔하게 써 내려가신 글도 매우 구수했습니다.
좋은 글 많이 부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