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과거청산이 미래여는 길
투명한 과거청산이 미래여는 길
  • 남해안신문
  • 승인 2006.08.2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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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편지] 김석훈 <편집국장>
지난 1970년대 전남 여천(여수시로 통합)에 살던 일가족 3명이 간첩으로 몰려 중앙정보부에 불법 구금된 뒤 온갖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35년만에 알려져 지역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당시 붙잡혀간 가족 가운데 젊은 여성이 성고문까지 당하고 이후 정신장애를 앓고 있다는 소식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17일 광주·전남지역 민간인 집단희생과 인권침해 관련 5건에 대해 현재 조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밝혔다.

이 가운데 지난 6월 조사가 개시된 여수 ‘K 일가 인권침해사건’의 경우는 전말이 드러났으며 권력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인권침해는 조사관들조차 아연케 했다는 내용이다.

사건은 지난 1971년 9월 여천군 한 마을에서 진실규명을 신청한 K씨의 어머니(당시 32세)와 사촌누나(당시 26세), 백부(당시 42세) 등 3명이 중앙정보부 여수출장소 소속 수사관들에게 간첩사건 관련혐의로 연행되면서 시작된다.

중정 직원들은 고문을 통해 이들의 간첩활동을 규명하려고 했으나 증거가 없어 결국 무혐의로 석방시켰다. 그러나 일주일동안의 구금기간동안 이들은 구타와 물고문 등 각종 고문을 당했으며, 중정 수사관들은 여성들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고문까지 자행했다고 한다.

진실화해 위원회는 당시 고문에 참여한 중정직원들의 명단확보와 소재 파악에 나서고 있다지만 과거 서슬퍼런 권위주의 정권이 우리 이웃에게 했던 만행의 전말은 2006년 여름 지역민들을 충격과 과거에 대한 말못할 고통으로 몰아 넣기에 충분하다.

아름다운 남해바다와 자연, 석유화학 공업단지로 알려진 여수는 과거 여순 반란사건으로 지칭되며 지역민에게 오욕을 안겨줬던 여순사건이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1일 여수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국군 제14연대가 정부의 제주도 4ㆍ3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친일파 척결과 분단정권반대를 주장하면서 비롯된다.

반군은 여수순천등 차례로 점령해 나갔고, 정부군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순지역 양민들 2500여명이 숨졌다.

반군과 정부군의 교전과정에서 반란군은 사상적으로 맞지 않는 다는 이유로 양민을 처형하고 진압군은 반란군에 동조하거나 혹은 자세한 동조여부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민간인을 처형했었다.

지역민들이 정부에 의해 또는 반군에의해 낮과 밤에 걸쳐 공포와 이유도 모르는 죽임을 당했고 여수 시가지가 통채로 불태워졌던 당시의 비극은 떠올리기 조차 끔찍한 역사가 되고 있다.

최근 35년만에 그실체가 드러난 일가족 고문 사건도 단일 사건에 그치지 않고 정부에 의해 자행됐던 사건들에 희생된 지역민의 아픔과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과거의 이런 사건들이 당시 지역의 문제라기 보다 정치 사회적 상황에서 기인한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큰 아픔이며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업신여김을 당한 지역의 고통이다.

50여년이 지난 여순사건이나 35년만에 드러난 일가족고문사건이나 모두가 우리 후손들이 짊어지고 헤쳐야할 고통이다. 이런 사건들이 더 있을 지도 모른다.

이런것들이 뚜껑닫힌채 세월만 흘려보내기 보다는 더 밝혀내고 드러내 보이며 사건의 실체를 명확히 규명해야 한다. 그것이 곳 지역의 후손들에게 짐을 지워 주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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