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곳곳이 역사의 현장
거문도, 곳곳이 역사의 현장
  • 남해안신문
  • 승인 2006.06.12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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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길의 땅이야기 86] 삼산면
삼산면의 거문도는 지리적인 위치로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겪은 섬이다. 조선 초기에 현 거문도를 고도(孤島)또는 고초도(孤草島)라 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 세종 5년에 고도(孤島)에 관한 기록과 세종 6년에 고초도(孤草島)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거문도를 고도라고 한 것은 이 섬에 왜인들이 고기잡이를 위해 살았기 때문에 '왜 섬'이라고 한 것을 '왜'와 훈이 비슷한 '외 섬'으로 훈차(訓借)하여 한자로 고도(孤島)라 하다가 후에는 옛 고(古) 를 써 고도(古島)라 하게 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전후로 하여 우리 주민이 입도한 뒤에는 현 거문도를 삼도라 불렀는데 거문도가 고도와 동도, 서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삼도는 조선초기엔 흥양현에 속해 풍헌이 다스리다 통영으로 이관 별장이 다스렸으며 철종6년에 다시 흥양현으로 복귀하였다. 1885년 거문진을 두어 경락사와 도첨사를 두었고, 1896년 신설된 돌산군에 포함시켜 삼도의 다른 이름인 삼산면이란 이름을 처음 사용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산면의 중심이 되는 거문도라는 이름이 사용되게 된 것은 1885~1887년에 걸친 영국군의 거문도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건이 나자 청나라에서 파견된 정여창 제독은 거문도에 자주 상륙하여 섬 주민과 대화를 시도하였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자 중국말 대신 한자로 글을 써서 주고받는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게 되었다.

당시 섬에는 귤은과 더불어 뛰어난 유학자로 알려진 만해 김양록 선생이 정여창과 필담을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선생의 뛰어난 문장에 감탄하여 정여창 제독이 조정에 청하여 거문도라 명명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조 실록' 19년(1795년) 5월 22일을 비롯하여, 호구총수 대동여지도 등에서 지금의 소거문도(小鉅文島)를 거문도(巨文島)라 표기하고 있고, 동시대에 발행한 여산지 등에서도 소거문도를 거문도(巨文島)라고 표기하고 있다.

삼도를 거문도로 처음 표기한 기록으로는 1885년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사건을 기록한 고종실록 22년 4월 3일(음)일자에 처음 나타나는데 정여창 제독이 거문도를 처음 방문한 것은 비슷한 시기여서 정 제독과 주민들의 필담에서 이름 지어졌다는 설(設)이 설득력이 있다.

소거문도를 거문도라고 한 것은 소거문도는 우리말 이름이 '거커리' 또는 '거끄리'(거글이)라고 부르던 섬으로 크다는 뜻의 <거(巨)>와 지역이나 장소 거리의 의미로 쓰이는 <커리>가 합쳐진 땅이름으로 큰 섬이라는 뜻이다. 이는 소거문도 곁의 작은 섬 <잔커리>와 대응되던 이름이기도 한데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거는 '클 거(巨)자로 '끄리'는 '글이'로 나타내어 훈이 <글>과 비슷하여 문(文)으로 표기를 하여 거문도(巨文島)가 된 것이다.

이런 유래를 가진 거문도란 섬 이름이 정여창 제독의 눈에 띄었을 때 거문(巨文)이란 뜻은 큰 문장이 살고 있는 삼도에 어울린다 하여 섬의 이름을 거문도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후에도 삼도는 조정의 기록에서도 거문도로 계속 표기 되었고, 1887년에 동도(東島)에 거문진(巨文陣)이 설진 되었으며 1896년 돌산군 삼산면 시절엔 다시 삼도로 불러오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부터는 현재의 거문도(巨文島)로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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