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말을 키우던 목장
조선시대 말을 키우던 목장
  • 남해안신문
  • 승인 2006.02.2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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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길의 띵이야기 73] 돌산읍 금성/율림
돌산읍의 가장 남쪽에 자리한 금성리는 작금과 성두마을로 이루어진다. 낚시터로 유명한 금성리를 이어주는 해변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을 <눈물고개>로 불렀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벽밥을 먹고 뛰어가던 학교 길의 추위를 기억하는 장년세대는 쉬 공감하는 땅이름일 것이다.

작금마을은 자갈기미가 줄어든 땅이름으로 해변이 자갈로 이루어져 불려진 이름으로 아직도 주민들의 입에는 <작기미>마을이다. 마을 북동쪽에 수십 기의 고인돌이 남아있고 조선시대에는 말을 키우는 목장이었다는 이야기와 그 터가 전해온다.

일제강점기에 뒤늦게 배운 글로, 일본이 싫다는 글을 바위에 새겼던 마을청년 주재연은 일경에 검거되어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의로운 죽음은 아직도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돌산읍의 남쪽 마지막 마을인 성두(城頭)마을은 <성머리>로 부르던 곳으로 목장성이 시작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두에서 신기마을까지 이어지는 성의 길이가 길어 만리성으로도 불렀던 이 성을 임진왜란 때 군사용으로 축성된 성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조선시대 전국의 목장을 그림으로 그렸던 그림지도에 목장성으로 그려져 전해온다.

마을에 들어서면, 수천 년 파도가 만들어낸 발달한 해안침식지형을 만나게 되는데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경관에 지리답사를 위해 찾아오는 많은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산에 오르기가 힘들다는 <댄 재꼴창>, 산 굽이가 쉰 두개나 된다는 <쉰두 굽이재>, <투구바구>, <망개산>, <분짓골> 등의 땅이름과 밤이면 남쪽바다 위로 바라보이는 노인성(老人星) 때문에 쉽게 백세를 넘긴다는 장수마을로 알려져 온다.?

성두마을 동쪽 전망대 고개를 넘으면 임포와 소율, 대율마을로 이루어진 율림리이다.

해수욕장이 있는 방죽포 마을로부터 이어져오는 길과 만나게 되는 율림리는 흰 자갈이 많아서 <흰개>로 불렀던 백포(白浦)와 바둑돌 크기의 자갈이 많았던 바돌개 기포(碁浦), 큰 밤개 대율(大栗), 작은밤개 소율(小栗)을 지나 향일암으로 유명한 임포에 다다른다.

임포마을은 옛 이름이 <깨개>인데 해변이 작아서인지 작은 <깻돌>이 많아서인지 분명치 않다. 옛 여천군의 마을유래지에서는 해안에 야생하는 들깨가 많아서 <깨개>라고 하였다는 재미있는 해석을 하였는데 이는 임포마을(荏浦)의 한자를 들깨 임(荏)자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임포마을 남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위로 향일암(向日庵)이 자리하고 있다. 통일신라의 고승인 원효대사가 절을 지어 원통암이라 하였고 고려 광종 때 윤필대사가 금오암(金鼇庵)으로 개칭하였으며 향일암이란 이름은 조선 숙종 때에 인묵대사가 지었다고 여수군지와 여산지(廬山志) 등에 전해온다.

높다란 바위위에 터를 잡아 암자를 지었기에 향일암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바위틈이 만들어내는 신비한 석문들을 지나야한다. 더군다나 암자주변으로 바위위에 조각을 한 듯 한 자연이 만들어낸 거북무늬의 바위와 바다로 나아가려는 주변의 산세 때문에 영구암(靈龜庵)이란 이름을 갖기도 하였다.

뒷산인 금오산과 기암괴석과 절벽사이로 피는 동백과 아열대 식물로 이루어진 숲, 남해 수평선과 어우러진 해돋이의 아름다운 광경으로 여수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알려지게 되어 역사적 가치와 주변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문화재자료 40호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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