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와 대복마을에서 한 글자씩 ‘신복리’
신기와 대복마을에서 한 글자씩 ‘신복리’
  • 남해안신문
  • 승인 2006.02.1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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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길의 땅이야기 72] 돌산읍 신복리
읍사무소가 있는 군내리 남쪽에 위치한 신복리는 예교와 신기 대복마을로 이루어진 법정리의 이름으로 신기와 대복마을에서 한 글자씩을 취하여 신복리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군내리에서 고개를 넘어 첫 번째 만나는 예교마을은 <왜다리> 또는 <예다리>라고 부르던 마을이름이다. 마을로 이어주던 다리를 <예다리>라 하였다가 임진왜란시 왜인에게 마을을 빼앗긴 뒤에 왜교(倭橋)라 고쳤다가 마을을 되찾은 뒤부터 예교(禮橋)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거문도의 고도의 경우도 왜인이 살면서 <왜섬>이나 <예섬>으로 불렀던 점을 보면 왜인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이름으로 보여 좀 더 많은 사료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곳이다.

대복(大福)마을은 본래 <복골>로 불러오던 마을이다. 마을이름은 <복자골>에서 유래하는데 <복자골>로 왜적을 유인하여 대승을 거두고 장렬히 전사한 조광준 장군의 무용담이 전해온다.

조광준 장군은 경기도 파주출신으로 장흥군의 장평으로 이사를 와 살다가 의병으로 수군에 들어와 고흥과 완도를 거쳐 방답진의 부진장의 임무를 다하였다.

1598년 11월 임진왜란이 끝이 났지만 남해안 일대에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던 왜구들이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는데, 1601년 왜구들이 방답진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듣고 방답진의 병사와 검단촌과 작금촌의 장정을 동원하여 복자골로 왜구를 유인하여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마침내 전투는 승리를 하였지만 애석하게도 조장군은 적의 유탄에 전사를 하고 말았는데 장군의 나이 41세였다. 장군의 시신은 마을 뒷산에 모셔졌고 그 후 영조임금께서 <가선대부병조참의>를 제수하였다. 복자골은 입구는 작지만 안쪽이 넓은 호수와 같은 골짜기로 대승을 거둔 다음에는 복병단(伏兵端)이란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신기(新基)마을은 <새터>라는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적을 이름이다. 본래의 마을 이름을 살펴보면 성종실록에 금음두(今音頭), 호구총수에 검단여(儉丹閭), 조선후기에 검단(劍端) 등으로 불려온 기록으로 보아서 숲이 우거져 검게 보여서 불려진 우리말 <검머리>가 칼끝이라는 <검단>으로 의미가 변하여 온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은 마을의 위치가 많이 변하였다고 하는데 1780년경 대 해일이 일어나 바다 수면이 육지보다 높은 형태가 되면서 그 모양이 칼끝같이 생겨서 검단(劍端)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마을의 위치가 바뀌어 생긴 마을을 <새터>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후 1959년에 불어온 사라호 태풍도 마을의 모양을 바꿀 만큼 큰 피해를 주어 또 한번의 <새터>를 만들어야만 했다.

신복리 마을 주변의 땅이름을 살펴보면 길게 벋은 ‘버든들’, 긴 산의 골짜기인 ‘진메걸이’, 큰 들 ‘한창들’, 벼락이 떨어진 ‘비락재’, 홀로 떨어진 산 ‘똥메산’, 숯을 구운 ‘숯구덩몰랑’ 삼을 재배했다는 ‘삼장’, 옛날 집을 지을 때 바르던 하얀 흙 <새벅>을 캐던 ‘새벅구덕’ 등의 땅이름들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노인어른의 설명 없이는 알지 못할 잊힌 말들이 되고 있다.

대규모 실내온실이 들어선 대복마을은 화훼단지로 유명하며 신기마을은 남면의 금오도와 연결되는 뱃길과 함께 낚시터를 안내하는 낚싯배가 많은 마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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