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군청 들어서면서 ‘군내리’로 불려
1896년 군청 들어서면서 ‘군내리’로 불려
  • 남해안신문
  • 승인 2006.02.0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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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길의 땅이야기 71] 돌산읍 군내리
돌산읍사무소가 있는 군내리의 이름은 1896년 돌산이 군(郡)으로 승격이 되면서 이곳에 군청이 들어섰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돌산이 군으로 설군되기 전에 이곳은 조선수군진의 하나로<방답첨사진>이 자리하였는데 진영이 석성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지금도 그 흔적은 마을 곳곳에 남아있다.

조선 중종임금 때 쌓아진 성의 기록을 보면 주위가 2,182尺(661m) 높이가 13尺(3.9m)의 사각형 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오랜 역사를 안고 있는 마을답게 땅이름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지역이다.

마을의 이름은 1896년 돌산도를 중심으로 한 도서지역이 군이 되면서 군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인데 돌산이 군이 되었던 것은, 당시 흥양과 완도로 귀양을 왔던 학부대신 이도재와 법부대신 신기선이 귀양살이 중에 겪었던 섬사람의 애환을 직접 겪으면서 복직이 되자 섬 지역 사람들끼리 행정구역을 만들어 주어야겠다는 뜻이 일치하여 완도와 돌산이 군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지금도 이들을 기리는 영세불망비는 군내리의 농협 옆 비각에 서 있다.
돌산군 이전 남해안을 지키는 전라좌수영의 전초 기지이던 방답첨사진은 중종18년인 1523년에 설진 되어 1895년 폐영되기까지 373년이나 외세로부터 남해안을 지켜왔던 곳으로 임진왜란 시에는? 충무공과 이름이 같은 이순신 첨사가 방답진의 병사를 이끌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지금도 마을 여러 곳의 땅이름은 1523년부터 5년간에 걸쳐 쌓았던 방답진 성과 관계가 깊다. 동내마을을 방답진 의 동문 안에 있는 마을이며 남외는 영남루라는 현판이 걸렸던 남문 밖 마을이며 서외는 굴강이 있던 서문밖에 있던 마을의 이름이다.

주민들이 ‘갱 안’이라고 부르는 굴강은 거북선을 만든 곳으로 알려진 신기동의 순천부 선소와 같이 천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물길을 만들어 배를 숨기고 썰물 시에도 출동이 가능하게 하였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군사들의 훈련장이었던 연무장터, 활을 쏘았다는 솔통, 제사를 지내던 사직단터, 임금이 돌아가시면 곡을 하였다는 망곡간 등의 이름들이 방답진 시절의 흔적을 전해주는 이름들이다.

이밖에도 도금터, 사창터, 불무통, 객사터, 옥터, 이방청 등의 옛이름도 마을의 역사가 묻어나는 땅이름들이다.

마을 동쪽 고개인 ‘동력곡’ 이라는 고개 너머에 있는 <돌밭들>은 한자로는 석전평(石田坪)이라고 표기한다. 돌산이 군이 되어 향교가 들어서자 석전평에서 공자님께 석전제(釋奠祭)라고 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앞일을 보는 선인들의 지혜가 놀랍다고 화제가 되었다는 기록이 여산지에 전해온다.

<돌밭들>을 석전평(石田坪)으로 고쳐서 생긴 일화로 땅이름의 억지스런 해석으로 만들어지는 이러한 예언성 우화는 대부분이 한자말의 해석이나 풍수지리를 곁들여 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돌밭들이 끝나는 산골짜기에는 고려 명종 때의 보조국사 지눌 스님께서 순천과 남면의 송광사를 오가다 쉬어가기 위해 지었다는 고찰 은적암(隱寂庵)이 자리하고 있다. 조용히 숨어서 수도를 한다는 뜻의 도량답게 아담한 암자에 병풍처럼 둘러진 석벽과 솔향이 짙은 숲으로 쌓여있어 조용한 운치를 즐기는 여행객이 많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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