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포구란 뜻의 <댓(大)개>가 죽포로
큰 포구란 뜻의 <댓(大)개>가 죽포로
  • 남해안신문
  • 승인 2006.01.2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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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길의 땅이야기 69] 돌산읍 죽포리
   
▲ 죽포마을전경
향일암과 군내리, 시내방면으로 나눠지는 삼거리에위치한 죽포리는 소라면의 대포, 삼일의 낙포와 함께 여수지역의 삼포로 불려오던 큰 항구가 있던 마을이었으며 방죽포에 방죽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마을 앞 조산까지 바닷물이들어왔다 전해온다.

죽포리의 본래의 이름은 큰 포구란 뜻으로 불렀던 <댓(大)개>였으나 이를 한자로 기록을 하면서 크다는 뜻의 대를 죽(竹)으로 표현하여 죽포(竹浦)가 되었다. 이후 방죽포에 방죽을 쌓아서 이 일대가 농토로 만들어지자 한자 포(浦)를 밭이란 뜻을 가진 포(圃)자로 고쳐 적으면서 지금의 죽포리(竹圃里)로 기록하게 되었다.

죽포리에는 동쪽의 두문포 마을과 남쪽의 방죽, 봉림마을과 함께 죽포마을이 행정리를 이루고 있는데 과거로부터 돌산의 중심에 위치한 마을답게 흥미 있는 역사가 의미 있는유적과 전설에 묻어서 전해온다.

죽포리를 둘러싸고 있는 산정에는 성터가 세 곳이나 전해져 온다. 본산성, 과녁성, 수죽성으로 부르고 있는 이 성들은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축성연대나 축조 목적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같은 시기에 만들어져 왜구를 방어하는 공동방어의 역할을 했던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집터와 우물이 있고 오래된 도자기와 기와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성터 내부는 십 수년 전 까지도 마을의 소들에게 풀을 뜯기며 놀던, 초지이며 놀이터였지만 소 먹이던 어린아이들이 사라진 지금은 숲이 들어차서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운 곳이 되었다.

마을에는 죽포 들을 만들면서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 만들어졌다는 조산이 여러 그루의 느티나무가 심어져 전해져 오고 1923년에 세워진 초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 운동장 모퉁이에는볼품없는 삼층석탑이 마을 뒤 골짜기에서 옮겨져있는데 우리지역에선 유일한 옛석탑이다.

두문포 마을은 본래 <두뭇개>로 부르던 곳으로 산으로 둘러 쌓여있는 마을 앞 포구의 모양 때문에 유래된 이름으로 둘러싸여 있는 개 <둠개>가 변한 말이다. 두뭇개를 한자로 표기한 기록들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두모포(斗毛浦)로 기록하고 있고 이 후 기록들에는 두무포(杜武浦)포, 두문포(杜門浦)로 기록하고 있다.

마을 가까이의 과녁성, 본산성과 함께 마을 이름두문포의 해석을 확대하여 백제시대의 돌산현의 치소로 이 마을을지목하던 경우도 있었지만 그 근거가 부족하다. 과녁성은 과녁을 설치하여 활을 쏘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 <과녁기미>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알려져 오며 과녁기미에 성이 있어 <과녁성>으로 부르게 되었다.

봉림리는 조선시대까지도 역기(驛基)동으로 불려지던 곳으로 <역터골>이 본래 지명이다. 전설로는 고려시대 이 마을에 역참이 있어 <역터골>이라 한다고 전해오지만 고려시대에 이 마을이 역원이었는지 아직 고증이 되지 않았다.

다만 마을 주변으로 덮개 돌의 규모가 큰 오십 여기의 고인돌이 산재하고 있어 이 마을 일대가 고대부터 많은 사람이 살았던 큰 마을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방죽포 해수욕장이 위치한 방죽리는 150여 미터의 백사장에 맑은 물과 낚시를 함께 즐길수 있는 여건 때문에 여름뿐 아니라 연중 시민에게 사랑을 받는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특히 200년 이상 되는 수백 그루의 해송이 숲을 이루고 있어 아름다운 경관뿐 아니라 소나무 그늘과 바닷바람이 연출하는 여수 최고의 피서지로 알려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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