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 공도정책, 임란이후 이주
조선초 공도정책, 임란이후 이주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12.30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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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길의 땅이야기 66] 돌산읍 평사리/둔전리
대미산 남쪽에 자리한 평사리 월암마을에는 마을 동쪽 고갯마루와 마을 앞 들녘 곳곳에 고인돌이 산재하고 있어 마을의 오랜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조선 초기 대부분의 섬에는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던 공도정책의 영향으로 지금살고 있는 주민은 임진왜란 이후 이주해 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도실(桃實)마을은 마을 뒷산에 도솔암이란 암자가 있어서 이 골짜기를 <도솔암골>이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되었다. 전설에는 고려명종 25년에 보조국사가 절을 건립하여 스님들이 수행을 하다 절에 빈대가 많아서 절을 불태우고 흥국사 뒷산인 진례산으로 옮겨갔다고 전해온다. 1970년대에 폐사지에서 동종이 발견되어 흥국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모장마을은 보리마당을 한자로 적은 모장(牟場)이 마을이름이 되었다. 보리탈곡을 위해 넓은 마당에 공동으로 보릿단을 쌓았던 곳을 보리마당이라 하는데 이 지역에 마을이 생겼기 때문에 땅이름으로 굳어졌다.

호수처럼 잔잔한 가막만이 마을 앞으로 펼쳐져있어 최근 멋들어진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섰다.

본산과 천마산 대미산 사이 산으로 둘러싸인 둔전리는 둔전(屯田)과 봉수(峰守)마을로 이루어져있어 조선시대의 중요한 관방의 역할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되었다.

둔전(屯田)은 고려, 조선시대에 궁이나 관아 군사용 주둔지 등에 딸린 관용지로 돌산의 방답진의 둔전에 마을이 이루어진 과정은 충무공의 장계에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화(戰禍)가 심했던 영남지역의 피난민이 비교적 피해가 적은 좌수영으로 몰려들었다. 그 중 좌수영 본영의 경내에 피난을 와 살던 사람도 200호가 넘었는데, 그들을 굶주리지 않도록 구제하기 위해 고심하던 끝에 목마장이던 돌산도에 이주시켜 농사를 짓도록 허가해 달라는 청을 조정에 올렸다.

이때가 1593년 1월 26일로 피난민도 살게 하고 군량미도 확보하는 일석이조의 계책을 올렸던 것이다. 이 후 조정은 충무공의 청을 받아들여 민간인이 돌산도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봉수(峰守) 마을은 마을 뒷산에 방답진 봉수(烽燧)대가 있어 봉수군이 살게 된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전국에서 서울의 남산으로 연결되는 5개의 봉수로 중 제 5거의 첫 번째 봉수대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던 방답진봉수대는 함경도 경흥의 서수라, 경상도 동래의 다대포, 평안도 강계의 만포진, 의주의 고정주와 함께 각 봉수로의 기점이었다.

방답진봉수에서 시작된 제5거는 화양면의 봉화산-고흥의 장기산- 장흥의 천관산-진도의 여귀산 등을 거치며 서해안을 따라서 서울 남산으로 소식을 전했고 여수와 순천의 간봉을 통하여 좌수영과 순천부에도 소식을 전하였다.

마을 이름을 살펴보면 한자이름이 봉수(烽守)-봉수(峰守)로 바뀌었는데 봉수군을 천한일로 여겼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마을 이름에서도 봉수군의 흔적을 지웠던 것이다. 화양면의 봉수군 마을인 봉오마을의 경우도 봉동(烽洞)에서 봉동(鳳洞)을 거쳐 봉오동(鳳梧洞)으로 변하여서 이러한 사회적분위기는 일반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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