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가 왜 이리 싱겁다냐?”
“막걸리가 왜 이리 싱겁다냐?”
  • 임현철 시민기자
  • 승인 2005.12.23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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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철의 세상얘기 3] 막걸리와 아부지
   
'아버지'의 사투리는 '아부지'다. 한 지인은 '아부지(我不知)'를 사투리와 우스개 소리로 풀이하면 '앎이 없는 사람' 또는 '가르침이 없는 덤덤한 사람'이라 평한다. 그렇다고 정말 아부지를 '앎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사투리만큼이나 '아부지'란 단어에는 구수함이 자리한다. 큰 산이라기보다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다정한 어감이 배어난다.

'아부지'를 떠올리면 막걸리가 빠질 수 없다. 지금은 법으로 아이들에게 술, 담배를 팔지 못하도록 하였지만 우리들이 자랄 때 막걸리 심부름은 응당 우리네 몫이었다.

이로 인해 우리들의 추억 속 한 켠에는 술에 취해 몽롱한(?)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이 추억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외상으로 양은 주전자를 들고 술도가나 점빵(가게)으로 가 술을 받아 들고 오는 길에 한 모금씩 야금야금 마신 아이가 늘상 들어 있다.

그러면 아부지들은 열 살 전후의 어린 심부름꾼들이 단풍처럼 빨갛게 물든 코끝과 발그레한 볼, 꼬부라진 말을 하는 폼새로 보통 때보다 늦게 도착한 아이를 보며 "허허, 이놈"하고 웃고 말았었지 아마!.

또 아부지들은 어린 심부름꾼들이 어느새 줄어든 막걸리에 멀쓱해 지레 겁을 집어먹고 물을 채워 '물 반 막걸리 반'이 된 주전자를 건네면 한 사발 따라 마시면서 모르는 척 "막걸리가 왜 이리 싱겁다냐?"면서 단숨에 들이키곤 하셨었지, 아마!

그리고 양은 주전자들은 죄다 왜 그리 찌그러졌는지. 분명히 처음 샀을 때에는 반듯한 주전자였을 터인데 하나같이 한쪽 귀퉁이나 뚜껑, 손잡이 등이 찌그러져 있는 손때 묻은 주전자들. 이런 주전자를 들고 다니면서도 우리들은 낡고 찌그러진 주전자보다 정겨움의 표식으로 여겼었지, 아마!

간혹 아부지들이 심부름 길에 과자값이나 얹어주면 길 가다 동전 주은 것처럼 횡재한 기분으로 한걸음에 술도가로 달려갔던 기억. 이럴 때면 찰랑이는 주전자를 총총걸음으로 급히 들고 오다 줄줄 새버린 막걸리로 인해 양이 줄어 머쓱해 했었지, 아마!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막걸리 타령으로 인해 코가 삐뚤어진 아부지를 보며 '나는 크면 절대 술 안묵어야제' 다짐하며 콧물을 넣고 코딱지를 타는 괜한 심술을 부려도 아부지들은 "왜 이리 막걸리가 달다냐" 했었지, 아마!

이렇게 아부지들과 연관된 막걸리에 대한 연상들은 과거의 소중한 추억으로 혹은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부지와 막걸리에 대한 추억들이 우리에게 '소중함'과 '아픔'으로 구별되는 것은 아부지의 주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나는 아부지가 술을 드시지 않아 이런 추억은 없지만 옆에서 대하던 일상이었다.)

사실 이런 '아부지와 막걸리' 추억은 농어촌의 추억으로 서민들의 삶과 관련이 깊다. 도시의 아버지와는 달리 세련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투박하고 소박한 아부지들의 모습이지 않았나 싶다. 이렇듯 우리는 아부지를 그리며 살아간다.

한 지인은 "아들이 다섯 살 때부터 아부지로 부를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 후 "간혹 아들과 엘리베이터를 타 자기를 아부지하고 부를 때면 같이 탄 사람들이 쬐끄만(조그만) 녀석이 아빠하지 않고 아부지한다며 신기한 얼굴로 쳐다보곤 했다"한다.

어린 아들에게 아부지로 부를 것을 요청한 이유를 물어보니 "그냥 아버지보다는 아부지가 구수한 맛이 나서 그랬다"고 한다. 그의 아들에게 "아부지라고 부르는 것 보다 아빠가 낫지 않아?" 물었더니 "아니요. 아부지가 훨씬 좋아요!" 한다. 부전자전이다.

며칠 전 이 지인의 사무실에 들렀더니 병원에 갔단다. 기다리고 있는데 지인이 들어섰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지인에게

"어이, 무슨 일 있는가? 병원가게."
"아들 놈 턱이 깨졌다고 전화가 왔는디, 아들 놈 데꼬(데리고) 병원 안갈 아부지가 있는가? 안절부절이제"
"얼마나 다쳤는디?"
"이놈 덕분에 반나절을 까묵었네. 턱이 다 나가분지 알았드만 쫌 째져 꾸매고 왔네."
"그래, 얼마나?"
"도라이바 십자 정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한바탕 시원스레 웃음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아들이 다섯 살 때이던가, 갑자기 다가와선 '아빠' 하지 않고 '아버지' 하고 불러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든 아부지든 예나 지금이나 자식에게 쏟는 애정은 이렇듯 변함이 없다. 그저 차이가 있다면 줄어든 자식들 숫자만큼이나 좀 더 적극적으로 아이들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노력이 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아버지로 변해있는 우리들이 불현듯 '막걸리'를 보면 '아부지'를 연상하듯(?) 현재 커가는 아이들은 무엇을 보면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절들을 떠올릴까? 라는, 작게나마 세대간의 고민 속에서 공통적인 아버지 상들이 있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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