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남아도 섬을 지킬 것이여"
"한 사람이 남아도 섬을 지킬 것이여"
  • 강성훈 기자
  • 승인 2005.12.15 2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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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에 들어선 듯 바다에 군락이룬섬
각양각색 섬 사이로 사람들 이야기는 매한가지
   
마지막 기획취재를 준비하면서 고민에 빠졌다. 남면권 섬을 찾아 나선 지 네 번째를 맞이하면서 마지막 행선지를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금오도를 중심으로 금오열도의 수많은 섬 가운데 하나의 권역을 찾아 나서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생각 끝에 두라리를 찾아 나서기로 결정했다. 최근 두라 주민들의 종교활동이 지상에 알려지면서 섬지역 선교활동의 모범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터라 색다른 섬이야기를 접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서다.

남면 화태출장소가 관할하는 지역으로 하나의 섬을 둘러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지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 가운데 하나다.

두라리는 지형이 두리두리하게 생겼다하여 두리섬, 두라섬, 또는 두라리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대두리도, 소두리도, 나발도를 합쳐서 두라리라 일컫게 된다.

일반적으로 섬사람들에게는 대두라도, 소두라도, 나발도로 불리운다.

돌산 끝에서 남쪽으로 4km를 내달려야 만날 수 있지만 금오도나 돌산 금오산 등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호수를 바라보는 착각에 빠지게 할 만큼 수많은 섬을 거느리고 있는 형국이다.

두라리는 크게 대두, 봉통, 나발마을 등 3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각 마을마다 하나의 섬을 이루고 있다.

먼저 대두마을은 봉통마을과 인접하고 있다. 북쪽으로 화태도, 동쪽으로 소두라도, 남쪽으로 송고마을이 손에 잡힐 듯 자리잡고 있다.

대두마을 역시 마을 뒤쪽에 높지 않은 산이 완만하게 둥글게 내리뻗어 바닷가를 따라 마을이 형성돼 있다.

1670년경 서씨가 처음 섬에 들어온 후 장씨, 김씨가 차례로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섬의 형태가 콩같이 생겨 대두라 불리워지고 있다. 섬이름이 대두로 되어 있어 옛날부터 100호를 넘지 못할 섬이라 하였는데 현재까지 99호까지는 이르렀으나 100호를 넘지 못하고 있음이 도서명의 대두에서 연유되었다고 전한다.

대두마을이 뭍에 알려진 것은 특별한 종교활동 때문이다. 물론 대두마을 섬사람들에게는 일상생활에 불과하다.

대두마을 전체 30가구가 대두교회 성도들이다. 주일에 일터에 나가면 눈치를 봐야할 정도다. 이 때문에 주일이면 30여척의 배가 어김없이 모두 항구에 정박해 있다. 성도의 50%는 매일 새벽기도회에 출석하고 있을 정도로 높은 신앙심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해외 선교사업에도 나서 도시지역 교회보다 왕성한 활동으로 종교인들 사이에서는 모범사례로 일컬어지는 지역이기도 하다.

현재 태국 매홍선주에 7000만원의 선교비를 지원, 선교센터교회를 건립하고 있고 해외선교지원은 물론 국내 미자립교회를 돕고 있기도 하다. 선교사역 뿐만 아니라 가족처럼 지내는 이들의 자녀를 위한 사업도 적극 나서고 있다. 대두교회 성도들은 자녀가 대학생이 되면 100만원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이미 8명이 장학금 혜택을 누렸다.

섬마을의 작은 교회에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결과 불과 5년전이다. 이홍식 목사부부가 새로 부임하면서 전 교인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게 됐고, 이제는 모든 생활이 시작이 신앙생활로부터 시작되는 변화를 겪고 있다.

“특별할 것 있나요? 함께 나누는 삶을 강조했을 뿐이죠”라는 이 목사의 설교가 섬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대두마을의 이런 변화는 최근 여수시가 발표한 손양원목사의 순교지
를 성역화하는 사업과 맞물려 새삼 여수지역이 갖는 종교 순례지로써 가치를 새삼 돌아보는 고민거리를 던진다.

윤수남씨는 “젊은 사람없고 부족한 것 많은 여느 섬마을과 다를 것 하나 없제라. 다만 마을 사람들이 서로 친형제간 만큼이나 생각해주는 것이 살맛나게 하는 것이제”라며 웃음을 짓는다.

대두마을을 빠져나와 인근 섬으로 배를 돌렸다.
여기저기 바둑돌마냥 자리잡은 다도해의 절경을 즐기는 사이 배는 어느새 봉통마을 선창에 닿아 있다.

   


대두라도와 같은 섬을 이루고 있는 봉통마을은 대두마을과 접하고 있다. 마을 뒤쪽 산이 공처럼 둥글다 하여 ‘두리섬’이라 불리우고 있고, 마을의 형태가 벌통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벌통구미’라 불리다가 봉통이라 이름지어졌다 한다.

아니나 다를까 포구쪽으로 다가서는 뱃전에서 바라보는 봉통마을은 영락없는 벌통모양이다.

완만한 산을 이루고 있지만, 포구를 중심으로 펼쳐진 마을이 가파른 형국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나발마을 역시 큰 변화를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 연세 지긋한 어른들이 월동준비에 나서는 모습이며, 오가는 사람없는 정적을 유지하고 있는 섬마을의 고요함을 들려준다.

나발마을은 나발도와 소두라도 2개의 섬으로 이뤄진 마을로 동쪽으로 소횡간도, 북동쪽으로 대횡간도, 북쪽으로 화태도, 서쪽으로 대두라도가 있다.

이 마을 역시 언제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았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소두라도는 1660년경 돌산에 살던 이수길이 처음 입주하여 살다가 타지로 이주해 가버리고, 이듬해 연도에 살던 김상국이 이주해 정착을 시작했고 1740년경 화양면에서 김해김씨가 이주해 왔다고 전해진다.

대부분의 지명이 그렇듯이 나발도라는 이름도 생긴 모양에 의해 지어졌다. 섬의 생김새가 나팔을 닮은 모양이다.

“섬 이름도 가지가지고 재밌기도 재밌제라”며 말을 건네는 선장 김씨다.

“제아무리 시상이 변했다고 해도 이 바닥이 수많은 자식들 키워서 내보내 곳이제. 사람이 없다고 안타까워 할 것도 없고 단 한사람이 남아도 여기를 지켜갈 것이고, 떠난 자식들 찾아주면 따뜻하게 안아줄 곳잉께 듬직하제라”며 키를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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