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이럴때 어떻게 했을까"
"아버지는 이럴때 어떻게 했을까"
  • 임현철 시민기자
  • 승인 2005.12.08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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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철의 세상 얘기 1] 영원한 인생의 나침반 아버지
   
▲ 아버지인 난, 언제 개펄 위의 배처럼 정박 할 수 있을까?
지인(知人)과 차에 잠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바람직한 아버지상은 어떤 걸까요?"
"첫째, 아버지. 둘째, 남편이 되어라."
무슨 선문답 같지만 '충실하라'는 말일게다.

그리고 그는 잠깐 기다리라며 집으로 들어갔다. 금방 환환 웃음을 짓고 '아이고 뜨거라'하며 온다. 손에 고구마가 들려있다. "막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군고구마를 만들었는데 하나 가져왔다"며 건넨다. '이게 아버지다'는 건지. 받은 고구마가 뜨겁긴 하다. 그리고 뜨거운 정(?)도 느껴진다.
그는 지리산에 거처를 마련해 가끔 집에 다니러 온다.

"우리 아이는 아빠랑 잔다며 울고불고 난리다. 아빠랑 자면 꿈도 안꾸고 편히 푹 잔단다. 그래서 막내랑 잔다. 기어코 아빠랑 자려는 건 뭔가 있어서다."
"…."

그래, 뭔가 있어서다. 근데 그 뭔가가 도대체 뭘까?

'아버지', 어느 땐 그지없이 높고 깊으며 그윽하다. 어느 땐 불같이 끓어오르는 활화산 같다가도, 그저 작고 왜소한 인간일 뿐이다. 이러한 인식에는 아버지 당신과 아버지를 바라보는 자식 간 감정의 부침(浮沈)이 자리한다.

외람된 말이지만 자라면서 난 '차라리 아버지가 없었으면…' 했다. 집에 거의 계시지 않아 잠시 들르시는 아버지가 불편했다. 아버지가 계시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다. 가족은 이래서 함께 살아야 하는가 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공백을 거뜬히 메웠다. 그게 아버지의 희생(?) 덕인 줄 난 몰랐다.

20대에는 어느 정도 커서 자아가 형성되었지만 주체적인 자기정체성 확립이 미진(?)하여 구닥다리 케케묵은 기성세대 중의 한 명인 아버지로서 인식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 때 자식으로서의 난, 다른 꿈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취직해야지'하면 '무슨 취직요?'했었다. 이런 이유로 아버지는 '뭘 모르는 먼저 세상을 살아온 아버지'였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제 잘난 맛에 사는 돈키호테, 그야말로 철딱서니 없는 존재였다.

30대에는 '우리 아버지는 왜 이렇게 사셨을까?'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로 남는다. 변변히 가진 것도 없고, 물려줄 것도 없는 아버지. 그리고 물질적으로 물려받을 게 없는 자식. 이 때가 아버지뿐만 아니라 본인도 가장 비참한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질과 정신 사이에서의 갈등을 겪는 시기. 하지만 어쩔 수 없음을 몸으로 배워가는 시기. 아버지를 이해하면서도 원망하는 시기. 그러나 세상은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삶에의 멍에를 알아가는 시기이다.

인생의 깊이가 어느 정도 생긴다는 4ㆍ50대에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긍정적인 아버지로의 인식변화를 가져온다.

40대에는 세상의 아버지들이 하나 둘 죽음을 맞이하기 시작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결정을 앞두고 '우리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 또는 '아버지는 이렇게 판단했을까'라는 상담하는 사람으로서의 아버지를 바라본다.

50대에는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운 아버지로서 '아버지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혹은 '아버지 같이 살 수만 있다면?'으로 변한다. 그리고 '저승에서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고민이 시작된다. 이 때의 아버지는 성공적인 삶을 사신 추억 속의 아버지로 남는다.

인생의 참맛을 알아가는 60대 이후에는 손자들을 키우는 자식들을 보면서 '아! 이래서 아버지가 그랬구나'를 느끼며 '아버지가 살아 계시기만 한다면?'하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큰 힘인 회한(悔恨)의 아버지로 여기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렇듯 나이에 따른 아버지에 대한 인식 변화의 폭이 큰 것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부산물일 것이다. 억지일수 있지만 그래서 교육은 인생사에서 필연적 부산물인 인식 변화의 폭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나 싶다.

이렇게 감히, 당치않게 아버지와 아버지로서의 날 그려보는 건 아이들이 우리의 전철을 밟지 않고 자라게 하고픈 소망 때문이다. 또 이렇게 기를 쓰고 아버지를 형상화(形象化)하는 작업 매달리는 건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내가 한참 자랄 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중 가슴 깊이 박힌 것은 "책 많이 읽어라. 자기 몸으로 경험하여 이치를 알았을 때는 늦다. 간접 경험을 통해 직접 경험을 느끼는 것이 세상을 앞서가며 슬기롭게 사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난, 그리 하지 못했다. 이 같은 이유로 난, 아이들에게 아버지와 똑같이 전해야 할까? '간접 경험을 통해 직접 경험한 것처럼 느껴라'고. 그러나 전할 수 없음을 안다. 스스로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지인(知人)이 차에서 말한 '아버지, 남편이 되라'부터 조용히 묵묵히 실천할 수밖엡.


새연재를 시작하며...

산업화 사회로 인해 핵가족화 되어가는 현실 속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설 자리가 조금씩 사리지고 있는 현실이 아쉽게 느껴진다. 본지는 이번호(68호)부터 직장과 가정에서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재정립해 보고자 ‘임현철의 아버지’를 연재한다.

필자인 임현철 시민기자는 여수시민협 실행위원장을 역임한 후 시민자치학교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사단법인 여수경영인협회 사무국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임 기자는 시민운동의 경험을 통한 냉철한 사고와 시각으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도 꾸준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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