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부터 좌수영 전초기지
조선초부터 좌수영 전초기지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12.0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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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길의 땅이야기63] 돌산읍
지금의 화양면 용주리 고진(古鎭)에 있던 돌산포 만호진은 전라좌수영의 서쪽 30리 거리에 있어 전라좌수영이 설진(設陣)되기 전부터 수군의 기지였다.

이곳에 어느 때부터 수군진이 설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지리지 등 기록에 돌산만호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아 고려 말이 아니면 조선 초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에는 모든 수군이 그랬듯이 돌산만호진도 성은 없었고 간단한 모사(茅舍)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 후 세종 5년에 진례만호가 여수시 국동으로 추정되는 내례포로 옮겨 내례만호가 되었다가 성종 10년(1479) 다시 전라좌수영으로 승격하니, 돌산만호진은 자연 전라좌수영의 관할이 되었다.

중종 17년(1522), 남해안 수군진의 일부를 보강 정비할 때 방답진(防踏鎭 : 돌산읍 군내리)을 새로 설진하여 돌산포(돌산이 성종때 돌산포로 바뀜)의 군선을 이곳으로 옮기게 되자 자연 돌산포만호진은 폐진 되고 권관(權官)을 두어 순천부의 진군들 가운데 약간 명의 군사만이 와서 지키게 되었다. 이때의 이진(移鎭)에 관한 명확한 이유가 기록되지 않고 있으나 침입하는 왜구의 방어에는 방답진의 지리적 위치가 보다 중요시되어 전진 배치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에는 공도정책의 영향으로 초기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방답첨사진>만 설치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유민이 많이 발생하자 유민들을 돌산의 둔전에 살 수 있게 허락 해 달라는 충무공의 장계로 나라에서 허락을 하여 일반인이 살게 되었다.

<방답첨사진>의 방답(防踏)의 명칭은 거제에 설진 되었던 방답만호가 혁파되면서 명칭이 옮겨온 예로 군선은 화양면 지역에 있던 돌산만호의 군선을 옮겨오고 방답의 명칭은 거제의 방답만호진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1896년 돌산은 오랫동안 복현운동을 활발히 벌여온 여수를 제치고 1년 먼저 군이 되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당시 조정의 관리였던 이도재와 신기선의 영향이 컸다.
대원군의 측근이었던 이들은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이도재는 완도에 신기선은 흥양으로 귀양을 온 신세였다.

귀양 온 이들은 남해 바다의 해안가에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섬사람의 삶의 실상을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당시 많은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살고 있던 섬 주민들을 위해서 섬 지역으로 이루어진 행정구역을 만들어야겠다는 소신을 갖게 되었다.

얼마지 않아서 대원군의 복권으로 다시 조정의 관리가 되자 두 대신의 의기투합은 완도군과 돌산군이 창설되는 결과로 이어졌고 광양의 태인도로부터 고흥의 섬 지역을 포함하여 거문도까지의 여러 섬들이 돌산군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돌산군은 1914년까지 일제식 행정구역 개편이 되기 전까지 군단위의 행정이 이어지다 당시 여수군에 포함되며 돌산면이 되어 지금의 여수시 돌산읍으로 이어졌다. 1984년 12월 15일 돌산대교가 완성되면서 돌산도는 섬 아닌 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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