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길의 땅이야기 61] 국동 신월동
[박종길의 땅이야기 61] 국동 신월동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11.2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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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항단지가 있는 국동(菊洞)은 <굿개>라고 부르던 지역을 한자로 고친 국포(菊浦)에서 유래된 동의 이름이다. <굿개>란 이름은 어민들이 굿을 하던 개(해변)란 뜻으로, 어업을 생계로 하던 어민들에게 자연재해는 피할 수 없는 영역으로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굿을 통하여 이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영당부근에는 용왕이나 신에게 올리는 많은 굿들이 이어져와 굿을 하는 개의 뜻의 <굿개>란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지리산이나 계룡산 등의 이름난 산에서도 굿을 하던 골짜기의 이름을 <굿골>이라고 한 예를 볼 수가 있으며 한자로는 국곡(國谷)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수의 <굿개>의 경우도 지금은 국포(菊浦)가 변한 국동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1789년에 발행된 '호구총수'에서는 한자로 仇叱浦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지명의 이두 표기법으로 <굿포>로 읽혀진다. 여기서 한자 질(叱)은 <ㅅ> 받침의 역할을 하는 이두 표기방법이다. <굿개>를 소리 나는 대로 기록한 국포(菊浦)란 한자는 글자의 의미와는 상관없는 소리글이었지만 이를 해석하려는 시도로 많은 전설과 유래들이? 만들어지게 되어, 국화모양의 지형에서 유래되었다는 터무니없는 전설도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국동지역은 좌수영이 들어서기 전에는 <진례만호>가 옮겨와 터를 잡은 <내례포만호진>이 있던 지역으로 지금 국동의 평지지역 대부분은 매립이 되어 바다가 육지로 변한 곳이다.

신월동은 해방 전까지도 봉양, 물구미, 신근정 등 3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마을로 여수에서는 동정과 서정 다음가는 큰 마을이었다. 앞에는 잔잔한 바다를 끼고 뒤에는 청산이 감싸고 있으며 주위는 바둑판같은 옥토에 둘러싸여 주민들은 반농반어로 꽤 풍족한 생활을 하여 옛날에는 봉산동 국동 일대 사람들이 신월리 덕으로 먹고산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42년 8월경 앞바다가 ㄷ자형으로 천연만을 이루고 있는 이 지역의 지형을 이용 일제는 수상비행장을 만들고 미평역에서 비행장까지 철도를 놓기 위해서 신근, 물구미, 봉양마을을 철거하였던 것이다.
비극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로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을 하고 떠나자 비행장은 빈 막사로 남아있었다.

해방 후 미군정이 사용하던 이곳은 1948년 5월 4일 다시 군용지로 편입되어 14연대가 창설되어 주둔하였으며 훈련을 받던 병사들이 제주4.3진압을 거부하면서 여순사건이 발발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사태수습과정에서는 여수와 인근지역의 수많은 민간인이 부역자란 누명을 뒤집어쓰고 수천 명의 인명이 동족에 의해서 학살되는 비극을 맞았던 것이다. 일제의 건설, 미군의 진주, 한국군의 주둔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현대사와 질곡을 함께하고 있는 이 땅도 신도심과 연결되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다시 예전 아름다운 마을로 돌아가는 부활의 꿈을 꾸고 있다.?

신월동에 있는 마을인 <넙너리> 마을은 넓은 해안가란 의미의 <너븐너리>가 줄어든 이름이며 <샘기미> 마을은 샘이 있는 해변이란 의미이다. 샘기미 마을을 한자로는 생금(生金)으로 기록하는데 해석하면 금이 난다는 뜻이 되어 이곳에 금광이 들어설 것이란 그럴듯한 유래에 한 때는 금광 채굴을 시도하려던 광산업자도 있었다고 한다.

바닷가 마을 이름 뒤에 붙는 <~기미>라는 땅이름은 해안의 후미진 곳을 일컫는 만(灣)과 같은 말로 한자로 기록할 때는 쇠 금(金)자로 기록을 하기 때문에 금과 관련된 전설이 많이 전해온다.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진 신월동의 땅이름으로 ‘동구떼’, ‘샘꼬랑’, ‘굴봉산’, ‘큰멍덤’, ‘작은멍덤’ 등이 있으며 공장부지 안에는 오래된 마을답게 지금도 많은 고인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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