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길의 땅이야기] 서강동·대교동
[박종길의 땅이야기] 서강동·대교동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11.18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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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장이 있는 서교동은 서초등학교가 터를 잡고 갖게 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서정이란 이름으로 불려오다 서교동의 이름은 해방 후에 명명되어 사용하게 되었다.

여수의 구 시가지를 크게 구분한 일제 시대의 서정에는 종동, 석정, 천동, 포동, 상정과 하정, 석교, 교동, 추동, 탕암, 구동, 성동, 연동이라는 지금은 들어도 그 지역을 가늠하기 어려운 동들이 있었다. 서초등학교는 1909년 10월 31일자로 인가를 받아 11월 19일 사립경명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처음엔 뜻 있는 지역유지들이 지원을 하며 노인당 건물에서 수업을 시작하여 1911년 7월 진남관을 임시 교사(校舍)로 사용하면서 여수보통학교로 인가 받으며 이전하여 1912년 3월에 첫 졸업생 8명을 배출하면서 이 지방 교육의 모태가 되었다.

서교동에 있는 서시장은 1934년 읍영(邑營) 서시장이란 이름으로 개설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재래식 시장으로 대형유통점이 곳곳에 들어서면서 시장의 기능이 많이 변모하였다.

옛날에는 가축시장이 함께 개설되어서 우시장이 있었던 곳에는 <쇠전거리>라고 하는 땅이름이 전해져 오며, 서시장에서 국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의 <논샘>과 <미나리깡>의 이름은 예전의 지형을 짐작하게 하는 땅이름들이다.

봉강동은 서당골이라는 마을이 있던 지역으로 좌수영시절 수사 최환이 세운 봉명재라는 서당이 있어서 불려지게 된 마을 이름이었다. 봉강이란 이름은 좌수영시절 만들어진 여수팔경중 하나인 봉강청람(鳳崗晴嵐) 에서 인용된 이름으로 구봉산 기슭의 안개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표현한 구절로 마을이 구봉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지어진 이름이었다.

봉강동과 인접한 봉산동은 봉산리라고 부르던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철의 원료인 사철이 출토되어 사철의 사투리인 <새철>로 불려지던 마을이었다. 마을에 있던 저수지는 용광로 가에 있다 하여 <놋강>이라하였는데 시가지를 매립하면서 생겨난 저수지 모양의 매립지를 놋강이라고 불렀던 것도 사철소가에 있던 놋강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봉산리 마을 입구에는 마을의 수호신인 벅수를 세워서 경계를 하여 벅수가 서있던 지역을 <벅수거리>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벅수거리가 <벅수골>이란 이름으로 변하여 전한다.

구 여수시가 있던 구항지역에는 봉산동과 함께 연등동과 덕충동지역에도 돌벅수가 전해져 오는데 여수의 벅수는, 여수만의 독특한 명문인 남정중(南正中) 화정려(火正黎)가 새겨져 전하며 잡귀와 액운을 막으며 화마와 수마를 막아달라는 기원이 담긴 마을의 수호신이라 할 수 있는 민속유물이다.

남산동은 남산아래에 동이 있어서 생겨난 이름으로 해방 이전에는 봉산리에 포함된 지역이었다. 남산은 다른 이름으로 예암산(隸巖山)이라 했는데 이산에 <이바구>또는 <예바구>라고 부르던 바위가 있어 한자로 예암산이라 한 것이다. 여수팔경의 하나인 예암초적(隸巖樵笛)은 예암산에서 들리는 나무꾼의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이야기하는 구절이다.

예암산 남쪽 돌산대교 부근 남쪽으로 머리를 내민 지역을 당머리라고 한다.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영당이 있어서 봄 가을로 마을에서 큰제사를 지내다가 지금은 진남제전 중에 풍어제를 지내고 있다. 영당에는 최영, 이순신, 정운, 이대원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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