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길의 땅이야기57] 한려동
[박종길의 땅이야기57] 한려동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10.28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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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와 현암도서관이 있는 덕충동 고갯길을 지나면 여수중학교와 여수역 부근에서 오동도 입구까지가 한려동이다. 여수와 여천시, 여천군의 삼려가 통합되면서 법정동의 이름은 그대로 두고 새로운 행정동이 탄생되었는데 한려동은 공화동과 수정동을 통합하여 한려해상국립공원인 오동도를 상징하는 동 이름을 갖게 되었다.

공화동이란 이름이 처음 생겨난 것은 일제식 행정구역개편이 있었던 1914년으로 그전에는 좌수영의 병영훈련을 위해 연병장의 기능과 무과시험을 치르던 연무각이 있었고 좌수영성의 장대가 있어서 불렸던 <장동>과, 비교적 평지 지역이어서 지어진 <평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어서 해방이 된 후인 1946년에 장동은 공화동, 평동은 평화동으로 바꾸게 되었다. 공화동의 이름은 여수를 동서로 나누어 동정과 서정으로 부르면서도 공화동 지역은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여 일본왕의 연호를 따서 소화정이라고 따로 호칭을 하였는데 소화정의 이름과 해방 후 이 지역에 여수군 청사를 비롯한 관공서가 밀집되어 있어서 공(公)이라는 글자를 취하여 공화동이란 이름이 탄생되었고 1953년부터는 평동이란 이름이 바뀐 평화동을 통합하여 오늘날의 공화동이 되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좌수영 동문밖에 있었다는 유왕암이란 바위와 이 지역의 공동 우물로 뿔 달린 도깨비가 나왔다는 <도치뿔 샘>, 여수역 청사 부근으로 숭어가 많이 잡혀서 불렸다는 <숭어더리> 등의 땅이름이 전해온다.

여수역은 1930년 12월 25일에 개통되어 지금까지도 철도를 통한 여수의 관문이 되고 있다. 건설당시의 목적은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력수송과 전남 동부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의 수탈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철도 개통일자와 같은 날에 일본 시모노세키로 연결되는 뱃길이 열리기도 하였다.

개항 후 여수는 세 가지 하얀 특산물이 많다는 뜻으로 삼백(三白)의 항구(港口)로 불렸는데 이는 쌀, 목화, 누에고치가 전라선 지역에서 착취되어 일본으로 옮겨가는 항구로 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정동은 좌수영의 장대와 성벽 너머에 있어 <장대너매>라고 부르던 지역을 일제식 동명으로 이름을 지으면서 이 일대에 나무가 많았던 특징을 살려 나무 수(樹)를 써서 <수동(樹洞)>이라 하다가 해방이 되면서 맑은 바닷물에서 연상되는 이름인 수정동으로 이름을 고쳤다.

수정동 동쪽 바다에 위치한 여수의 상징 오동도는 동백꽃과 신이대(시누대)를 비롯하여 후박나무 해송 등 190여종의 수목을 볼 수 있는 자연학습장이며 바다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하는 여수의 대표적 관광지이다.

오동도가 전국에 알려지게 된 것은 신항을 만들기 위한 방파제가 만들어지면서인데 섬과 다리가 이어지자 기암과 절벽으로 이루어진 해안과 때묻지 않은 섬의 자연환경이 섬을 찾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방파제는 1935년 일본인들에 의해서 착공되어 1940년대 초에 완성된 것으로 일본해군의 군사시설로 쓰이다 해방 후에야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로웠다고 한다.

오동도는 옛날에는 <대섬>이라고 불렀었는데 오동도란 이름으로 불려진 것은 조선 후기부터다. 대섬이란 이름은 해안지방의 마을 앞 바다에 있는 섬을 대부분 대섬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대나무 섬이란 의미보다는 육지와 잇대어있거나 가까운 섬이란 뜻으로 이름 지어졌으나 섬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죽도(竹島)로 표기하여 대나무가 많은 섬으로 오인하게 된다.

돌산대교의 북쪽으로 지척거리에 있는 장군도의 본래 이름도 대섬으로 여수팔경으로 이야기하는 죽도청풍(竹島淸風)도 오동도가 아닌 장군도의 이야기였으나 지금은 대부분 오동도로 소개가 되고 있다.

수정동 지역에 전해지는 땅이름으로는 충무공께서 활을 쏘던 사정을 만들고 바닷가에 접해있던 해운대에서 이름을 따서 지은 해운정이라는 활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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