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길의 땅이야기 56] 덕충동
[박종길의 땅이야기 56] 덕충동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10.2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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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민사
덕충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덕대마을과 충민사의 이름을 따서 지은 덕충리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된 동이름이다.

덕대는 본래 <떡더골>이란 땅이름으로 불렸는데 이는 언덕이 있는 지형을 이르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일의 신덕마을 옛이름도떡더골>덕대>신덕으로 변해왔으니 두 지역 지형의 공통점을 비교해보자.

충민사는 임진왜란이 끝나자 좌수영의 교리이던 박대복이 현 충민사의 자리에 가세를 털어 2칸짜리 사당을 짓고 제형을 모시던 곳이었는데, 전화의 상처가 정리된 선조 34년인 1601년, 체찰사로 내려온 이항복이 민심을 살펴본 후에 왕명을 받아서 통제사였던 이시언에게 명을 내려 건립한 사액사원이다.

충민사의 이름은 당시 선조가 직접 이름을 짓고 현판을 내렸다고 전하며, 이렇게 건립된 충민사는 아산의 현충사보다는 103년 전이요, 통영의 충열사 보다는 62년이나 앞서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충무공 사당이다.

전쟁이 끝나고 당시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충무공의 공을 인정하여 내린 사당이었던 것이다.

충민사와 나란히 자리 잡은 사찰 석천사는 이충무공의 사당인 충민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 1600년초 정유재란이 끝난 3년 후에 임란을 슬기롭게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한 바 있는 옥형 스님과 자운 스님이 충무공의 전사 후에 공의 인격과 충절을 잊을 수 없어 충민사 사당 곁에 공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충무공이 즐겨 마시던 석천 가까이에 단을 쌓고 3년 상을 지내면서 그들이 거처할 암자를 지은 것에서 유래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게 된 사찰이다.

충민사 입구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낮은 사각형의 돌비석에 하마비라는 글귀가 새겨진 것을 볼 수가 있다. 하마비는 주로 궁궐이나 종묘, 문묘, 성현의 탄생지, 향교 마을 등의 입구에 세워서 말을 타고 가는 사람도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라는 표시 석으로 본래는 충민사 입구라 할 수 있는 지금의 동초등학교 뒷길 부근에 있던 것을 덕충동 고개로 도로가 신설되면서 충민사의 입구로 옮겨 놓게 되었다.

하마비의 의미로 부르는 땅이름으로 <하막등>이라는 땅이름이 있는데 하막등은 마을 입구에 말에서 내려야 하는 위치에 붙여져 낯선 마을로 찾아가는 이방인이나 장가를 가는 신랑도 찾아가는 마을의 하막등에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예를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충민사가 있던 북쪽 골짜기는 <외얏골> 또는 <앳골>이라 하였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는 와(瓦) 동으로 표기하여 기와를 구웠던 곳이란 뜻이 되어버렸다. 앳골의 유래는 바깥쪽의 의미로 <외얏골>이라 하기도 하고, 오르기 힘이 들어서 붙여졌다고도 하며 절 아래 마을에서 탈 없는 애를 낳는 풍속에서 유래된 마을 이름이라는 설 등 다양한 유래가 전해온다.

2012년 세계박람회 후보지로 예정된 덕충동 동쪽의 해안지역에는 귀환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지역이 있다. 해방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 중에 갈 곳이 없던 사람들이 임시로 거처하던 지역을 부르던 이름으로 많은 애환과 사연을 간직하던 귀환동포들이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만들어가면서 하나 둘씩 떠나며 대부분의 사람은 떠나고 땅이름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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