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길의 땅이야기55] 연등동
[박종길의 땅이야기55] 연등동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10.13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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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동은 조선 성종때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이 바닷가에 설치되면서부터 관문의 역할을 하던 지역이다. 그러다보니 오랜 세월에 걸쳐 오가는 길손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던 이 지역의 자랑거리가 하나 둘씩 늘어나서 공적비와 사적비 등의 유물유적이 많이 전해진다.

연등동의 마을 유래는 옛날 여승이 암자와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등불처럼 화려하게 장식하여 놓으니 길을 지나다 이를 바라본 명성이 높은 스님이 연등이란 마을 이름을 쓰면 선남선녀가 많이 배출되고 마을이 크게 발전할 거라 하여 연등이라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연등(連燈)이란 한자이름에서 연상된 연꽃과 등불의 이미지와 그럴듯한 풍수지리를 곁들인 전설이다.

그러나 실제 연등이란 마을 이름은 연꽃과는 무관한 이름이다. 연등은 전라좌수영이 있어, 영이 있는 등성이란 뜻으로 이 지역이 좌수영 성의 산등성이 부근에 위치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었지만 ‘영등’을 한자로 기록하면서 연등(蓮嶝)으로 기록을 하였다가 연등(蓮燈)으로 한자가 바뀌었기 때문에 유래도 바뀌었다.?

지금은 한재로 부르는 여서동과 광무동의 산 고개도 영으로 넘는 고개 영고개가 변한 말 <영곡>이었고 지금의 화양면 용주리의 돌산만호진의 옛터 ‘영 터’도 한자로 표기하면서 연기(蓮基)란 마을이름으로 변하였으며 지금도 연등동 지역에 오래 살았던 노인들의 발음은 <연등>보다는 <영등>에 더 가깝다.

오랫동안 좌수영 관문이었던 연등동 길가의 많은 비석들 중에 의미 있는 비석 한두 가지를 살펴보면 '호좌수영수성창설사적비'와 '절도사 안숙사적비'를 들 수 있다.

호좌수영창설사적비는 의승수군 300여명이 전라좌수영을 보수하고 자원하여 지켰다는 내용으로 정조 3년인 1779년에 세워진 것이 음각되어 있고, 절도사 안숙 사적비는 1809년 순조 9년에 부임한 절도사 안숙이 문무를 권장하고 흉년에 주민구제에 노력하였으며 서민의 혼. 장례를 돕고 거북선을 복원하고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는 등 선정의 모범을 보여 안숙이 여수를 떠나자 주민들이 세우게 된 사적비라고 기록되었다.

사적비들과 함께 연등동 도로변에 있는 귀중한 문화재로 돌벅수를 들 수가 있다.
벅수는 마을의 입구에 서있어 마을의 잡귀와 유행병을 막고 하늘과 땅을 평정하여 수마와 화마로부터 마을을 보호해 달라는 기원이 담겨져있는 신물로 연등동 돌벅수의 특징으로는 여수지방만의 독특한 명문인 남정중과 화정려의 명문과 함께 왕방울 눈과 길고 큰 자루병 코 등을 하고있는 해안지방에서 흔하게 보는 조각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제작자의 정쪼기 흐름을 참고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연등동 벅수는 목장승이나 석장승에는 찾아보기 힘든 제작 연대가 보이는 데 화정려(火正黎)의 뒷면옇戊申四月二十八日 午時立化主?主事 金?昇」이라고 명문이 刻字되어 있어 연호 "戊申"의 기록으로 보아 1788년, 정조 12년임을 추정할 수 있다.

연등동 도로와 함께 길게 이어진 냇가인 연등천에는 학들이 많이 날아와 놀았다는 하구바구와 자라바구의 이름들이 전해져 왔으나 도시화와 함께 옛 모습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연등동을 안고있는 종고(鐘鼓)산은 전라좌수영성을 품에 안고 있던 산으로 고지도에 보면 한자로는 수복등으로 표기되고 있고 수박등이란 이름이 전해져 온다. 산이름 종고산은 충무공께서 지었다는 전설과 함께 국가의 전란이 있을 때마다 산이 종처럼 울어서 미리 대비하였다고 전해오며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자명고와 같은 존재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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