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다”
“이제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다”
  • 박태환 기자
  • 승인 2005.09.15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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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항운노조 투쟁현장을 가다
할아버지를 보며 울어대는 손주 녀석들을 받아 안은 양영교(60)씨.
연신 손주들의 눈물을 훔쳐냈지만 감옥 같은 철문 사이로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어색한지 울어대는 아이들의 눈물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양씨는 물론 주변에서는 10여일만에 만난 남편의 손을 철창너머로 잡고 아무말도 못하고 눈물을 훔치는 아주머니에서부터 “30년 일한 대가가 이것이냐”며 울분을 삼기는 아주머니까지 남해화학 정문은 때 아닌 통곡의 벽으로 변했다.

남해화학의 상차비 80% 삭감 요구로 10여일째 현장을 지키고 있는 항운노조원 120여명과 그 가족들의 상봉이 이뤄진 지난 5일 남해화학 정문의 모습이다.

그리고 또 다시 10여일이 지난 14일 만난 항운노조원들은 이곳저곳 투쟁에 따른 생채기를 안고 있었다.

누구는 지난해 장파열로 수술했던 자리가 도져 병원에 입원했고 또 누구는 60 노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투쟁에 참여했다 과로로 쓰러져 입원하기도 했다.

담석으로 죽을 듯한 고통 속을 해메다 수술한지 하루만에 다시 투쟁현장으로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은 20여일을 라면으로 때워 장염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그래도 ‘물러설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70~100KG 비료 30년 등짐에 남은 것은 상처 뿐

이 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이들이 매달리고자 하는 항운노조는 도대체 무엇인가.

여수종합항운노조는 지난 77년 남해화학이 여수에 둥지를 틀고부터 공생의 관계를 맺어 왔다. 당시 하루 70~100KG의 비료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르는 트럭에 배에 옮겨 싣는 중노동을 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70~100KG의 무게는 성성하던 어깨와 허리를 뭉개버렸다. 누구하나 성한 어깨와 허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러다 보니 술로 고통을 참고 파스는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소지품이 되었다.

초죽음이 되어 들어오는 남편을 바라보는 부인과 아이들은 어깨를 주물러주는 일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 자리에 김태욱(46세, 가명)씨도 있었다. 어릴적 방황의 길을 걷다 참한 아가씨를 만나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사이에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과 공주 같은 이쁜 딸도 생겨났다.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그렇게 항운노조를 찾았다. 몸으로 때우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던 김태욱씨도 매일 70~100KG의 무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술이 늘고 집안 싸움이 잦아졌다.

싸움이 많아지자 결국 아내는 집을 떠났다. 아이들만 남겨둔 채. 그때서야 김씨는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희망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정신 차려야한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돌아온 자리에 이번에는 남해화학이 상차비 80% 인하를 요구해왔다.

“항운노조를 협상 파트너로 인정할 때 농성 풀어”

김씨는 “1월부터 5월까지 한 5개월 열심히 몸을 움직여 받는 금액이 약 2000만원 정도다. 이 돈으로 1년을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남해화학이 80%를 인하한다고 한다. 그러면 1년 동안 400만원으로 살아라는 말인데 가능한갚라고 반문했다.

김씨는 또 “지난 99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며 “특히 99년 당시 남해화학이 자동화를 요구하며 상차비의 대폭 인하를 주장해 남해화학과 항운노조가 전국을 돌며 상차비에 대한 요율을 다시 책정했다. 그 단가가 현행 톤당 3179원이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항운노조도 남해화학의 자동화 주장에 맞춰 지계차를 다루는 방법을 배워 지금은 조금 작업에 속도도 붙고 있는 상황이다”며 “이제 자동화시켜 사람의 손이 덜 필요하니 사람을 쫓아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병원에 입원했던 사람들이 다시 현장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다. 대책이 만들어지지 않는 다면 모두가 이곳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있다”며 남해화학이 항운노조를 협상의 대상자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다시 투쟁 현장으로 돌아가는 김씨의 휘어진 어깨에 마지막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였다.

[에필로그] 2005년, 여수산단에 아직도 전태일이 있다

우리에게 ‘아름다운 청년’으로 기억되고 있는 전태일 열사.
전태일 열사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어린나이에 여섯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구두닦이를 비롯해 신문팔이, 삼발이장사, 껌팔이, 우산장사, 뒤밀이 등등 평화시장의 재단사가 되기까지 숱한 밑바닥 일들을 경험하게 됐다.

스물 두 해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어쩌면 단 하루도 쉬어보지 못하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성실히 일했건만 일당은 14시간 노동에 커피 한 잔 값밖에 안되는 50원.

평화시장의 다락방에서 피를 토해내며 쓰러지는 어린 여공들을 바라보며, 잘못된 사회현실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 도달하게 됐다.

그는 일기장에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라고 쓴 후 1970년 11월 13일 마침내 자신을 다 바쳐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불꽃이 됐다.

그러나 전태일 열사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를 외치며 분신한지 35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현장에서는 노동자가 기계처럼 일을 하다 이제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내쫓기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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