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길의 땅이야기 52] 문수동
[박종길의 땅이야기 52] 문수동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09.0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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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동은 시가지로 조성되기 전 허문마을과 소미마을이 합쳐서 이루어진 동이다.

허문마을은 '허미' 또는 '허문쟁이'라고 부르던 이름을 <허문정(許文亭)>이라 표기하였고, 마을을 처음 만들 때에 허 씨와 문 씨가 마을을 이루어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가졌다고 전해왔다.

화양면 이목리의 <전동(田洞)>이나 돌산읍 금촌리의 옛 이름인 <이가통> 등도 전 씨와 이 씨가 처음 마을을 이루어 전동과 이가통 마을이 되었다고 알려져 왔지만 허문마을의 경우는 본래 '허문징이(험한징이)'가 변한말로 마을 주변의 험한 지형 때문에 불려진 땅이름이다.

소미(小美)마을은 작은 마을이 아름다워 지어졌다는 유래가 전해지는데 소미(小美)란 한자의 뜻풀이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소미 마을의 본래의 마을 이름은 '작은 밑들'로 '큰 밑들' 미평에 대응되는 이름인데 이 지역의 들판이 미평에 비해 작았기 때문에 소미평(小美坪)이라 하였다. 소미는 소미평(小美坪) 을 줄인 마을 이름인 것이다.

소미마을에는 입구의 삼거리와 고락산성 아래의 재밑마을, 솔재넘, 벅수골, 진넘 등 지형의 특징에서 유래한 지역이름이 전해오다 지금은 길이름으로 남아서 그 흔적을 전해준다.

마을에는 사충단터와 삼황묘가 있으며 뒤로는 백제시대의 산성인 고락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사충단터는 한말의 충신이었던 조병세, 송병선, 민영환, 최익현 등을 모시던 사당이었다.

삼황묘는 1926년 순종황제의 장례식 때 여수 유림대표 정충섭, 정영민, 최석주, 최봉삼 4인이 중심이 되어 유림 50여명을 규합, 여수 유림 조선통곡단을 결성하여 열차 편으로 상경하려 했으나 일제 관헌에 의해 제지를 당했다.

그러나 은밀히 야간 선박 편으로 부산을 거쳐 순종 황제 장례식에 참가함으로써 전국 유림으로부터 여수 유림의 충정을 높이 칭송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귀향 후 향내 유림들을 설득하여 태조 고 황제(이성계), 고종 태 황제(고종), 순종 효 황제(순종)의 유덕을 숭모하고 민족 정신을 고양하기 위하여 여수시 문수동 고락산 기슭에 사우를 창건하였다.

제행 후 다시 동무를 건립하여 면암 최익현, 의사 안중근을 배향하였으나, 외삼문에 새긴 태극 무늬가 문제가 되어 태극을 새긴 강진영은 일제 관헌을 피해 멀리 피난을 가야 했다. 그 후 일제는 1939년 드디어 삼황묘를 강제로 철묘시키고, 정명민 최석주, 최봉삼 등을 투옥하였다.

광복 후 1947년 강진영과 최봉삼의 아들인 최영모, 정기로 씨가 중심이 되어 삼황묘를 다시 설립하고 근년에 이르러 삼황묘 보존회가 발족, 선인들의 충정 어린 제행을 매년 3월 12일로 계승하고 있다.

고락산성은 해발 201미터인 고락산 정상과 아래 봉우리에 600년을 전후한 백제시대에 쌓아진 고리모양의 테뫼식 산성이다. 고락(鼓樂)산성의 이름은 북을 치고 즐긴다는 뜻으로 둥둥골이란 산아래 골짜기 지명에서 유래되었는데 한동안 충무공과 관련된 임란유적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발굴을 통하여 백제식 산성으로 드러났다.

산성은 봉우리에 둘레100미터의 부속성이 자리하고 낮은 봉우리에 둘레 354미터의 본성이 자리한다. 발굴유물로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를 비롯하여 토기와 철기류, 석환, 우물 등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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