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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길의 땅이야기 50] 둔덕동
[박종길의 땅이야기 50] 둔덕동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08.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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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드래미재
둔덕동은 용수, 문치마을에다 신죽마을 일부가 병합되어 만들어진 행정동명으로 석창으로 이어지는 고개마루의 <둔덕>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둔덕>이란 이름은 1789년 편찬된 호구총수에도 나타나는 마을이름으로 둔덕 고개의 용수마을 아래 들판이 좌수영의 둔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고개 언덕에 둔전이 있어서 둔덕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것이라고 마을의 촌로들이 전해준다.

호랑산 아래 용수마을은 연등천의 발원지로 알려진 용 바위 아래에 있다 하여 용수마을이라 했다. 마을뒷산인 호랑산에는 백제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으로 보이는 호랑산성이 대부분 허물어진 채 전해온다.

신라의 화랑들이 호연지기를 키우며 이 성에서 놀았다 하여 ‘화랑산성’으로도 알려진 이 성터에는, 우물자리와 집터 100여명 이상이 들어간다는 동굴 등이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진례산까지 이어지는 등산로의 경치가 남해의 바다와 어우러져 경탄을 자아낸다.

용수마을은 오래된 마을답게 많은 수의 고인돌이 전해지는 곳으로 오늘날과 같은 마을이 들어서기 전에는 300기 이상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선사유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던 근대에 들어서 호명과 순천으로 이어지는 도로공사와 1970년대의 새마을 사업, 마을의 확장 등으로 덮개 돌이 깨어지고 정원석으로 실려나가면서 훼손되고 지금은 수십 기의 고인돌 만이 마을 주변에 흩어져 있다.

이 마을에는 오랜 전통을 이어온 용수농악이 전승되고 있다. 전라좌우도의 농악을 혼합한 형식으로 복색이 화려하며 기민한 동작과 활기찬 가락 등이 특징이다.

용수마을은 다른 이름으로 왕십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지금은 진남관만 남아있는 좌수영성에서 이 마을까지의 거리가 십 리였기 때문에 붙여졌던 이름이다. 서울의 왕십리도 광화문에서 십 리가 되어 불려진 것이라는데 같은 뜻으로 지어진 재미있는 이름이다.

‘독다리’로 더 잘 알려진 <석교마을>은 용수 남쪽마을로 용수마을에서 흐르는 개천으로 마을 입구에 큰 돌다리가 있어서 석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좌수영 시절에는 마을 뒷산이 송전으로 지정되어 있어 송전 밑 마을로 알려져 있었다.

문치마을은 쌍봉으로 이어지는 고개가 암반으로 이루어져 물이 흐르면 미끄러워져서 ‘민드래미 재’라고 불렀던 곳으로 조선시대 후기에는 고개에 유명한 서당이 있어서 문치(文峙)마을로 불렀다고 전한다.

문치마을 서북쪽 뒷산에 지금은 공업고등학교의 실습장으로 사용되는 곳을 밖에서 잘 보이지 않은 숨은 골짜기라 하여 ‘수문골’이라 불렀는데 한자로는 수문(水門)으로 기록하였다.

이 골짜기 정상에서 둔덕고개까지에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산성이 위치한다. 한 동안 이 산성을 계함산성으로 잘 못 표기하고 불렀는데 본래의 이름은 수문성(水門成)이다.

문치마을의 유적지로는 한국전쟁 당시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와 일경에 의해 한 팔이 잘려나가면서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윤형숙 열사 등이 도주하던 공산당의 무참한 총칼아래 목숨을 잃었던 순교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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