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길의 땅이야기49] 만흥동
[박종길의 땅이야기49] 만흥동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08.1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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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 기슭에 자리 잡은 상촌, 중촌, 평촌이란 3곳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만흥동은 옛 이름이 ‘만앵이’라 전해진다.

만앵이란 이름은 이 곳 골짜기에 만흥사라는 절이 있었던 기록이 있어 만흥사에서 유래된 기록인지 만흥을 만앵이로 표기한 것인지 확실치는 않다.

만흥동의 다른 이름<만성리>의 유래에 대해서는 1993년 여수문화원이 발간한 여수동사(麗水洞史)에,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만흥리란 마을 이름이 발음하기 어렵다하여 천성산의 성자를 따서 만성리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성리는, 일제 강점기인 1939년 7월에<만성리해수욕장>의 개장과 함께 전라선 철도와 연계되어, 비교적 교통이 편리하고 검은 모래 해수욕장이라는 특색 등으로 널리 알려지며 유명해졌다.

남해바다와 오동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주변경관과, 검은 모래 알갱이에 뜨거운 태양빛을 한껏 머금은 열기는 신경통과 부인병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진다. 매년 음력 4월 20일 ‘검은 모래 눈뜨는 날’행사는 전국도처에서 찾아오는 만성리의 찜질인파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이다.

이러한 유명세 때문에 만성리란 마을 이름은 1953년에 이미<만흥리>란 이름으로 다시 고쳤지만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만성리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봉화산과 천성산 사이의 골짜기 중턱엔 절터인 만흥사 터가 전해져 오고 아래에는 한지(韓紙)를 만들었다는 지소(紙所)터가 전해져오는데 만흥사 절에 있던 스님들이 품질이 좋은 한지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함께 전해오고 있다.

지소 터와 절터 부근에는 한국 서양화단의 선구자 이었던 김홍식 화백의 생가 터가 있지만 지금은 그의 이름도 업적도 아는 이가 별로 없어 예술계의 거목이었던 선생의 업적에 지역 예술계라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상촌과 중촌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으로 볼 수 있는 몇 기의 고인돌이 남아있어 이 마을의 긴 역사를 전해준다. 고인돌 상석이었을 바위를 깨어서 만든 절구통을 보여주는 주민의 이야기에서 문화재 보존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만성리 남쪽으로 시가지와 연결되는 마래터널은 <만성리굴>이라는 이름으로 더 불리는데 여수와 익산을 이어주는 전라선 철도공사로 1928년에 착공되어 1930년에 완공을 보았다.

일본인 회사의 감독아래 주로 중국인 노무자들이 공사를 하였는데 당시의 열악한 장비와 기술 탓에 수많은 희생을 치렀다 전해진다. 최근 국도 17호선 우회도로와 철도의 이전으로 박물관으로 전환이 검토되고 있다 한다.

터널의 북쪽 도로변에 인접한 도로변에는<형제묘>라고 하는 고분과도 같은 대형 분묘가 전해온다. 이곳은 여수의 아픈 역사인 여순사건의 가장 큰 상처 중 한 곳이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일으켰던 14연대의 군인들이 모두 도망가고 진압군에게 탈환된 여수에, 진압군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군경은, 여러 곳에서 민간인들을 재판도 없이 학살하였는데 이곳에서는 125명이 총살되고 불태워진 곳을 돌과 흙으로만 덮어서 지금의<형제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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