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길의 땅이야기] 오천동
[박종길의 땅이야기] 오천동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08.04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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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촌과 소라, 화양에 이어서 구여천시 지역인 쌍봉과 삼일지역의 마을이야기를 마치고 이번호부터는 구 여수시 주변의 동과 마을의 땅이름의 유래를 살펴봅니다.

오늘날의 석창지역을 중심으로 하였던 여수는,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자 이에 반기를 들었던 고려의 마지막 현령 오흔인 불복으로 폐현이 되어 치소로서의 기능을 잃고 말았다.

이로 인해 여수지역은 순천부에 예속되어서 관의 지배를 받았는데, 세종5년인 1423년에는 삼일지역에 있던 진례만호가 혁파되었고 오늘날 여수시 국동지역인 내례포로 만호진이 옮겨왔다.

이 후 성종 10년인 1479년에는 약칭하여 좌수영이라고 하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全羅左道水軍節度使營)이 설치되면서 남해안 중심의 항구로 발전하게 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면 지금은 시가지로 많이 변해버린 여수에는 어떤 마을들이 있었으며 어떻게 변해왔는지 각 동(洞)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여수시의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오천동은 오만이 마을과 중천마을, 모사금마을이 통합된 마을로 오천이란 이름은 <오만이>와 <중천>에서 한 글자씩을 취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오만이 마을은 움푹 파인 골짜기 안에 마을이 있어 '옴 안'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오마니라고 한 것을 오만여(五萬閭)라는 한자이름으로 음차(音差)하여 지어진 마을 이름인데 한자의 이름에서 마을 이름의 뜻을 찾으려고 했던 옛사람들은 본래 마을이 풍수지리로 보았을 때 가재 혈이어서 마을이름을 가재 오(?)와 뫼 만(巒)으로 하여 오만이라고 하였다는 유래를 만들어 전해왔다. 그러나 1789년의 호구총수 기록을 보면 오만을 다섯 오(五)와 일만 만(萬)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말 이름에서 유래된 땅이름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오만이 마을에서는 들 가운데 있던 작은 마을을 ‘들몰’과 가운데 있어서 ‘간데몰’이라 하였고, 마을 왼쪽 산등성이를 ‘차올챙이’, ‘고갯재’, ‘쇠너리’, ‘당산’, ‘비사등’ 등의 숱한 사연을 가진 땅이름들을 만들며 살아왔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빈터만 남아있는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오만이 마을이 빈터로 남아있는 사연은 우리 여수의 가장 아픈 역사로 남아있는 여순사건과 관련이 있다.

사건이 있었던 해방 무렵 오만이 마을 아래에 여수시의 수원지가 만들어지자 당국에서는 수원지 상류의 주민을 이주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다 때마침 여순사건이 일어나고 이 마을에도 여느 마을과 다름없이 부역혐의자들이 생겨나자 오만이 마을이 반란자들의 거주지라는 오명을 씌워 50여 호의 마을 주민 모두를 내몰아 마을을 폐쇄하고 뒷산 고개 넘어 호명마을로 반강제적인 이주를 시켰던 것이다.

여순사건이 종료된 뒤에도 수원지 보호를 구실로 오랫동안 살아온 고향을 빼앗겨버린 슬픈 역사가 묻혀있다.

이처럼 여순사건의 상처는 오랜 세월을 평화롭게 살아온 시골마을까지도 사라지게 하였는데 최근 과거사법이 통과되면서 재조명 작업들은 더욱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 숨겨진 진상들을 공개되고 아픈 상흔이 치유되기를 기대해 본다.

<모사금> 마을은 모살이라는 사투리로 말하는 모래가 많은 해변이어서 지어진 땅이름 모살기미가 변한 말로 해수욕장으로 알려지면서 여름에는 많은 시민들이 찾는 휴식공간이 되었다.

오천이라는 이름을 만든 오만이와 중천 마을은 사라졌지만 모사금 마을을 중심으로 80년대 초 쥐치포 공장 등의 수산물 가공공장이 들어서면서 확장되어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최근 마무리가 한창인 신덕으로 이어지는 망양로(望洋路)가 완공되면 해수욕장과 함께 아름다운 해안경관으로 시민들에게 더욱 사랑받는 마을로 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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