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길의 땅이야기] 삼일<6> 상암동
[박종길의 땅이야기] 삼일<6> 상암동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07.01 09: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상암동은 고려시대의 진례부곡에 이어 조선초기 진례만호진이 설진되어 있었던 곳이며 진례산의 봉수터와 성황사터, 다수의 고인돌들이 남아있는, 역사유적이 산재한 유서 깊은 마을이다.

<진례 designtimesp=17936>마을은 고려시대에 있었던 진례부곡으로부터 그 이름이 등장하는데, 호랑산에서 흘러내리는 긴 하천 때문에 긴 냇가의 뜻으로 ‘질 내’라고 했던 땅이름을 한자로 음을 옮겨 진례가 되었다.

마을 안에 작은마을로 남촌과 북촌이 있고, 신진과 조곡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진례부곡의 터는 <조곡 designtimesp=17939>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조곡(槽谷)이란 이름이 구시골을 훈차(訓借)하여 지어진 이름이기 때문인데 구시골은 소 여물통의 사투리인 구시모양의 골짜기가 아닌 들판의 평지에 있기 때문에 구시골은 구시 모양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며 ‘구실골’ 이나 ‘구술골’로 불렸던 관청을 뜻하는 옛말이 변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아서이다.

<신진 designtimesp=17944>마을은 새로 생겨난 진례란 뜻으로 마을이 커지면서 ‘새터’에 마을이 들어서자 이 지역을 신진(新進)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상암 designtimesp=17947> 마을은 ‘웃바구’라고 하던 마을 이름을 뜻 옮김한 마을 이름으로 고인돌 군락의 바위 중 맨 위편에 위치한 바위를 칭한다.

마을 뒤편 산에는 많은 바위들이 있어서 웃바구라는 마을이 생겨나게 된 배경을 짐작케 하는데 이들 바위는 옛날 옛적에 금강산을 만들려는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금강산으로 가다 멈춰버린 설악산의 울산바위처럼 금강산이 완성되어서 멈추어 섰다는 ‘상암돌’이란 바위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당내 designtimesp=17952> 마을은 ‘당안’이라고 하던 마을 이름을 한자로 고친 이름으로 ‘순천부에 성황산은 진례산이고 성황사가 있어서 매년 제사를 지냈다’는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으로 보아 당내 마을에 당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당집이 있던 터도 전해 내려온다. 마을 뒷산에 전해져 오는 ‘재부리깍금’이라는 땅이름의 ‘재부리’란 뜻도 성황사의 제사를 지내던 일과 관련이 있는 이름으로 생각된다.

<읍동 designtimesp=17955>마을은 ‘골’이라고 부르던 곳을 고을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읍동이라는 이름으로 고치게 되었다. 조곡과 함께 진례만호진 터로 보는 사람이 많은데 읍동의 한자의 뜻에 얽매인 경우가 많다.

까치산에서 유래된 <작산(鵲山) designtimesp=17958>마을은 양지와 음지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뒤편으로 고국사라는 절터가 있었다. 1998년도에 발간된 마을유래지에서는 이곳을 고려국사가 변한말이라고 하여 순천부의 성황사지로 보았지만 진례산에 있었다는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과 주변에 전해져 오는 땅이름과 구전되어 오는 전설로 보아 성황당은 당내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터가 전해져 오기에 주변의 지표조사로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비료공장의 건설로 이주한 낙포동은 공은선생의 죽음을 슬퍼한 기러기가 3일을 울다가 떨어져 죽어서 낙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알려지던 마을이다.

호구총수에서는 ‘비학(飛鶴)동’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진례만호진 시절에 전선(戰船)은 이곳 포구에 배치하였다. 선소의 우리말 이름인 ‘배무시’ 마을과 모래가 많던 모래개 ‘사포(沙浦)’ 마을, 남해와 마주보던 큰 바닷가엔 ‘한구미’마을이 있었지만 산단의 확장과 석유비축기지 건설 등으로 수천년의 삶터를 양보하고 새 터를 찾아 떠났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