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길의 땅이야기] 삼일<5> 적량동 월래동
[박종길의 땅이야기] 삼일<5> 적량동 월래동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06.25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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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산단의 시초가 되었던 호남정유가 최초로 들어섰던 적량동(積良洞)은 고려시대부터 부곡(赤良部曲)이란 이름으로 전해온다.

광양만의 풍부한 수산자원과 진례산을 배경으로 한 기름진 땅에 남해의 따뜻한 기후는 우리나라 어느 곳 보다 살기 좋은 자연 환경이었다. 삼일포향, 적량부곡, 진례부곡 등 삼일지역엔 유난히 많은 향과 부곡의 이름이 전해온다.

고려시대의 향, 소, 부곡은 고려의 건국에 반대했던 지역이었다는 주장도 있어 김총을 선두로 했던 견훤의 세력하에 있던 여수에서 삼일지역이 그 중심에 있지는 않았을까?

산단이 건설되면서는 삼일 지역에 산재해 있던 고인돌 유적의 발굴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비파형청동검 등의 청동기 유물과 옥으로 된 부장품들이 다량으로 출토되면서 기원전 시대에 펼쳐졌을 범상치 않은 이 지역의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적량동에 전해지는 옛 지명에는 ‘누래등’이라는 이름이 전해온다. ‘누러 또는 ‘누리’라는 옛말은 노적가리를 일컫는 말로 식량을 쌓아놓았다는 뜻의 적량(積糧)과 일치하지만 전해지는 한자기록이 적량(赤良)으로 전해지고 있어 혼란스럽다.

적량동 안에 있던 작은 마을로는 윗 지역과 아래지역으로 나뉘어 상적과 하적마을이 있었으며 마을이 구멍처럼 깊숙이 들어온 만(灣)에 자리하여 군영개로 알려진 군장(君藏)마을은 임진왜란 때 군인들이 숨어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으로 알려졌다.

정유공장이 건설되면서 70년대부터 이주하던 마을은 1988년 모두 이주하게 되면서 상적마을이 있던 마을 어귀에 망향의 탑을 세웠다. ‘정월 대보름 추석 한가위.... 다정한 정든 숲들 정자나무 모두를 찾을 길 없네! 라는 탑의 글귀에서 고향을 떠나던 이주민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적량동에서 가까운 월내동도 70년대 후반부터 이주가 시작되어 90년대 초에 마을이 모두 이주하였다. 마을의 옛 이름을 ‘달한’이라 하여 1759년의 호구총수에서도 달한(達汗)으로 기록되었지만 차츰 ‘달안’으로 불려지면서 한자표기도 달 안쪽이라는 뜻의 월내(月內)로 기록하게 되었다.

‘달 안’이라는 지명은 산의 옛말인 달에서 유래된 말로 산으로 둘러싸인 안쪽의 마을이란 뜻이다. 마을의 위쪽에서부터 상촌, 중촌, 하촌으로 불려졌으며 마을 앞 바닷가에 길게 벋은 해안을 장구미라고 하였고 솔무령, 진다불, 꼬드래목, 골명재, 장밭금이, 인판산, 누래등, 가무여 등 지명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묻혀진 이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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