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길의 땅이야기] 삼일 3- 월하
[박종길의 땅이야기] 삼일 3- 월하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06.09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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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산단로를 따라 삼동마을을 지나면 만나는 월하동은 ‘다라골’이라는 아름다운 땅이름이 있었다.

다라골은 한자로 기록을 하면서 ‘달 아래의 마을’로 해석하여 월하리(月下里)가 되었는데 ‘달빛이 곱게 비추는 아래 마을이 있어 이름 짓게 되었다’는 유래도 더해졌다.

또 다른 유래로는 일반가옥의 다락방의 의미처럼, 마을의 지형이 높은 곳이어서 지어졌다고 하나 이 일대의 지형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달은 옛말로 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었다. 달아골은 산 아랫마을이라는 뜻으로 월항마을의 옛 이름 달목, 월내마을의 옛 이름 달안이, 월전의 이름 달밭기미처럼 이름말 달이 산의 의미를 갖고 있는 곳을 여수반도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달아골 월하동 주변의 여러 마을은 여수산단의 조성으로 대부분 이주하였는데 이제는 그곳에 살았던 사람에게도 이름조차 희미해진 마을 이름을 되새겨 보자.

월하동의 이름을 갖게 하였던 ‘달아골’ 원월리가 있었고 봉산머리에 있어 마을 이름이 된 봉두마을, 달빛이 고와서 이름 지어졌다는 월성마을, 옹기점이 있어 점등이라고 하던 곳에 조금씩 민가가 늘어나자 ‘새터’라 하여 지어진 신촌마을이 있었다.

칠성마을은 마을에 칠성단 제단이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고 소상마을은 중국의 소상팔경의 아름다운 풍경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소상등’이나 ‘소산징이’로 더 많이 불렸다.

남창마을은 ‘남해촌’이라고 하였는데 남창이라고 한 것은 남해촌의 이름과 쌀 창고의 창자를 따서 남창이라고 하였다. 이는 1941년 화치제방을 쌓고 만들게 된 새로운 간척지의 건설로 경상도의 남해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마을을 처음 이루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마을이었다. 소라면의 관기들과 대포들에도 남해사람들이 이주해와 남해촌이라는 마을을 이루기도 하였다.

평여동은 ‘들몰’이라고 하였던 곳으로 너른 들이 있던 마을이어서 불렸던 이름을 한자화 하였다. 지금은 마을은 모두 사라지고 밤낮없이 공장의 기계소리만 요란한 여수산단의 중심부가 되었다.

마을 뒷산이 송전이어서 유래되었다는 신송마을 호랑산 본줄기란 뜻으로 지었다는 산본마을, 새로운 마을 ‘새터’에서 유래된 신흥마을 들이 평여동 지역에 있던 마을들이었다.

남수마을은 정수장과 화물터미널 공단의 부품을 공급하는 사무실 등이 밀집된 곳으로 산단 지역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마을 중 한 곳인데 호랑산 계곡의 물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그 남쪽 물가에 마을이 위치하여 남수라 하였다고 전해온다.

이 지역에는 고대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살기가 좋아 많은 선사 문화재가 산재해있었는데 여수산단이 개발되면서는 고인돌 유적이 많이 발굴되었다. 당시의 발굴 자료를 살펴보면 고대 사회에서 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던 옥과 구슬이 무더기로 발굴이 되어 번영을 누렸던 옛 선조의 삶의 흔적을 짐작하게 한다.

저수지가 있는 계곡의 곳곳마다 구레미골, 노래골, 물방아골, 조탑골, 장작골, 뽁쥐밭골, 배골, 불당골, 따박골, 성주골 등의 이름만으로도 그곳에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전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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