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700여년전 전라좌수영성
이것이 700여년전 전라좌수영성
  • 정송호 기자
  • 승인 2005.05.20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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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 모형 진남과 임란유물전시관에 상설 전시
축조당시 좌수영성 실체 한눈에 볼수 있게 표현
   
전라좌수영의 본영(本營)이자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본거지였던 ‘전라좌수영 성’이 축소 모형을 제작돼 진남관 임란유물전시관에 전시돼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 4월 제작된 이 축소 모형은 호좌수영지(1847년간), 호남읍지(1871년간) 등의 자료를 근거로 축척 1/200의 크기로 사업비 1억원을 들어 축소 제작된 것이다.

이 모형에서는 조선시대 초기의 성곽형태와 성벽, 남문 ․ 동문, 성내 관아 및 민가, 포루, 해자, 연못 등을 연출해 당시 좌수영성의 실체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표현 됐다.

전라좌수영성은 1479년(성종 10년) 좌수영이 설치된 후 성종연간(1485~1490년)에 축조됐다.

이 무렵에 축조된 읍성(邑城)들은 고려시대의 토성(土城)보다 성벽(城壁)이 높고, 옹성(甕城) 등이 설치되어 방어력이 높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 성(城)이다.

전라좌수영성은 임진왜란 당시는 전라도 동남부의 육지부와 돌산도 사이 길목에 위치해 왜군들이 해안을 따라 한양으로 가는 뱃길을 가로 막는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 좌수영성은 축성(築城)이후에도 1592년부터 1774년까지 성내의 관아건물과 성곽의 신축과 보축(補築)이 있었고,

1847년 간행된 호좌수영지의 의하면 당시 '성곽(城郭) 주위가 3,158척, 여첩(女堞) 437坐, 총혈(銃穴) 1,302처의 규모와 성내(城內)에 600여칸에 달하는 관아(官衙)건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있다.

이것으로 보아 좌수영성은 1895년 좌수영이 폐영(廢營)되기까지 주진(主鎭)으로서 존속돼 있으면서, 400여년간 조선의 수군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좌수영성은 일제시대에 ‘읍성 철거령’에 따라 진남관을 제외하고는 다른 지역의 읍성과 마찬가지로 성곽(城郭)과 관아(官衙)건물들이 훼철(毁撤)내지는 방치됐다.

또한, 1916년 여수지역의 해안매립과 민가조성이 좌수영성(營城)의 흔적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데 가속화시켰다.

광복 후 좌수영성의 흔적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문영구교수(前여수대학교)의 좌수영연구, 향토사가들의 현지조사, 순천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사료 등을 통해 성터와 관아의 위치가 일부 확인되었으나 이미 옛터는 도심지로 조성된 상태다.

한편, 성곽의 복원과 발굴이 어려운 현시점에서 여수시가 이번 좌수영성의 모형제작은‘잃어버린 좌수영성’의 재현을 시도하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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