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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동 여우모양과 닮아 ‘여수 골’로 불려
안산동 여우모양과 닮아 ‘여수 골’로 불려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03.2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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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길의 땅이야기] 쌍봉
안산동의 여수마을은 지금의 부영여고자리에 있던 마을이다. 마을의 지형이 여우모양과 닮아 예로부터 방언인 ‘여수 골’로 불려지다 이 곳에 마을이 들어서자 소리 나는 대로 음을 빌려와 여수마을이라 하였다.

비슷한 경우의 율촌의 호산(여수 뫼)과 화양면의 호두(여수머리)마을은 여우 호자를 써서 표기한 것과는 다르게 여수마을은 고울 려(麗) 자와 물 수(水)자로 표기하여 이름의 의미가 변하였다.

안심산에 자리한 사찰 안심사로 오르는 길가에 위치한 심곡마을도 우리말 땅이름을 한자화한 마을 이름이다. 골짜기가 깊어서 ‘지픈골’ 이라고 불러오던 곳을 한자로 깊을 심(深)자와 골짜기 곡(谷)자를 써서 심곡(深谷)이 된 것이다.?

선원동(仙源洞)은 근대식 행정구역 개편이 되던 1914년에 무선마을과 도원마을에서 뒷글 자를 취해서 만들어진 행정리의 이름으로 무선, 도원마을과? 사벽, 가곡, 반월, 죽점 마을이 포함되었다.

무선마을은 조선 중기까지 이곳에 무상원이라고 하는 역원(驛院)이 있다가 임진왜란 후에 덕양 역으로 옮겨갔는데 무선마을 이름은 무상원이란 이름이 변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알려진다. 마을 뒷산인 무선산에는 예로부터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우단이 있어 자연과 함께 살아야했던 선조들의 삶의 흔적들이 전해온다.

도원사거리에서 화양면과 소라면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오른편을 차지하고 있는 도원마을은, 지금의 시가지로 조성되기 전 마을 앞으로 염전의 방죽이 있어서 이를 도니라고 하였다. ‘도원’은 ‘도니’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비슷한 음의 이름으로 바꾸게 된 마을 이름으로 이 곳에 복숭아나무가 많아서 지어진 마을이름으로 생각하기 쉽다.

도원마을에는 일제 때까지도 소금을 만들던 염전이 있었다고 한다.
여수시 제1청사 부근에 있었던 사벽마을은 ‘새복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으로 본래의 뜻을 알기가 어렵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새마을운동 노랫말인 ‘새벽종’과 음이 비슷하여 새벽마을로 개칭하여 새벽종소리와 함께 열심히 일하는 마을로 홍보가 되기도 했던 재미있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

반월마을은 토미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뻗은 마을 뒷산이 반달처럼 생겨서 지어진 이름이다. 여수 현의 치소였던 석창을 경계하기 위한 초병들이, 토미산에서 파수를 하면서 밤에 근무하는 신세를 빗대어 반달 인생이라고 한데서 마을이름이 유래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마을 북서쪽으로 위치한 뒷산에 반월성이라 하는 성터가 전해오고 마을 남쪽의 토미산에 도 백제시대 산성으로 알려진 토미산성이 있다. 성터 주변의 조사에서 많은 양의 옛 기와와 토기, 자기류 등이 발견되어 지역의 역사 학자를 중심으로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여수현을 중심으로 한 옛 역사가 많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가곡마을은 토미산 남쪽에 있었던 마을로 택지가 조성되면서 마을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주택지와 아파트단지로 변모하였다. 마을 주변의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를 본 여수현의 현령이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가곡의 이름은 변두리의 뜻인 ‘갓-골’을 소리옮김하여 표기한 마을 이름으로 생각되는 곳이다. 이 마을에는 임진왜란 당시 전공을 세운 정철, 정춘, 정인, 정대수 라는 정씨가의 사충신을 배향한 사충사 사당이 있었는데 택지조성으로 웅천동으로 옮겨갔다.

죽점리는 반월산의 서남쪽에 자리잡았던 마을로 반월산에 대나무가 많아서 반월리와 함께 조선시대에는 죽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큰 마을이었다.

마을 안에 예로부터 대나무 제품을 만들어 팔던 죽점이 있어서 죽점이라는 마을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죽공예품의 사용이 줄어들면서 하나둘씩 이사를 떠나 지금은 죽점도 사라지고 ‘대밭밑’이라는 땅이름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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