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무공 세계해전사 ‘우뚝’
이충무공 세계해전사 ‘우뚝’
  • 강성훈 기자
  • 승인 2005.03.0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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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해전 평가
   
▲ 한산대첩 전투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은 기원전 480년 그리스연합군 테미스토클레스제독의 “살라미스 해전”, 1588년 영국 하워드제독의 “칼레해전”, 1805년 영국 넬슨제독의 “트라팔카해전” 등과 함께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힌다.

■ 살라미스 해전

테미스토클레스 제독의 살라미스(Salamis)해전은 기원전 480년 9월 그리스 도시국가(아테네, 스파르타 등)들과 페르시아(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대황)와의 전쟁이다.

전쟁결과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테미스토클래스(Thenistokles)제독 휘하 전선 380척과 크세츠크세스대왕 휘하 아리아 비그네스(크세르크세스의 동생)총사령관을 중심으로 페르시아군은 1.300여 척의 전함과 17만 5천여 명의 병력이 싸운 결과 200여 척의 전선이 침몰되고 200여 척이 그리스 전사들에 의하여 나포됐다. 반면 그리스쪽은 전선 40여척만 잃었다.

그리스의 일방적인 승리는 살라마스 해협의 좁은 만으로 유인하여 지형과 편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그리스 전사들의 확고한 신념과 용기, 바람의 도움 등을 승리 원인으로 파악하고 있다.

해전 이후 아테네는 지중해의 강자로 군림하여 해상교역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으며, 그리스는 문화와 정치의 황금기를 가져오게 된다.

■ 하워드 제독의 칼레(Calais)해전

1588년 8월 7일 신흥 해양국가 영국의 엘리자베스여왕을 중심으로 하워드(Charles Howord)경을 사령관으로 호킨스, 드레이크 등의 명장이 이끄는 80척의 전함과 8,000명의 병력으로 에스파니아의 펠리페 2세 휘하 시도니아(Medina Sidonia) 공작이 이끄는 알마다 무적함대(Armada Invincible) 130여 척 3만여 명이 칼레 해안에서 세계 해양권을 다투는 대해전이 펼쳐졌다.

해전결과 무적함대는 8월 7일 칼레 연해에서 영국군의 함포에 의한 야습으로 타격을 입고 그라블리스 해전에서 결정적 타격을 받아 54척만 본국으로 돌아가고, 이 해전의 패배로 에스파니아의 해상 무역권을 영국에 넘겨주고 네덜란드가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영국은 300여 년간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음.

당시 최강의 해군을 자랑했던 에스파니아 함대가 무너진 것은 과다한 병력과 자만심에서 기인한다. 또한 포격전을 강조한 영국 함대의 전술과 선박 운용술, 네델란드 함대의 충분한 지원을 그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다.

■ 넬슨(Nelson)제독의 트라팔카(Tragalgar)해전

1805년 10월 21일 이베리아 반도 남서부 트라팔카 해안에서 넬슨(Horatio Nelson)제독이 이끄는 56척의 전함이 프랑스 빌뇌브(Pierre Villeneuve)제독이 이끄는 프랑스ㆍ스페인 연합 함대 전함 67척을 격멸시켜 나폴레옹의 영국 침략 야욕을 분쇄시켰다.

트라팔카 해전의 패배 이후 군사적 천재라고 일컬어졌던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를 침공하려고 계획했지만, 이 해전의 패전으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영국 침략을 포기하고 대신 대륙 봉쇄령을 통해 영국 상선의 대륙 입항 차단 작전으로 선회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해군 전략이 육군 전략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 반면, 영국은 육군과 대등한 위치에서 독자적인 해군 전략 수립으로 승리를 거둔 것으로 평가됐다. 이와 함께 넬슨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섬멸전을 사용함으로써 범선시대에 영국 해군의 전술발달을 최고조에 이르게 하였다.
넬슨의 판단력과 결단력이 돋보인 해전으로 이후 해군 지휘관들의 사표가 되었다.

■ 이순신 장군의 한산해전(閑山海戰)

1592년 7월 8일(음력) 조선과 왜군은 국가의 흥망과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양국 주력 함대끼리의 해전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전개됐다.

조선은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전라, 경상도 좌ㆍ우수사가 참가하는 연합 함대 56척과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총애하는 왜장 와키자카 야스히루가 이끄는 76척의 함선과 1만 여명의 수군이 견내량 해역에서 결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조선 수군은 최초의 철갑선으로 평가받는 거북선을 앞세워 학의 모양을 한데서 유래된 학익진 전술을 펼침과 동시에 우세한 일제 집중타방식 함포사격으로 왜선 59척을 가라 앉히고 9,000여 명의 왜군을 수장 시키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한산해전의 승리로 왜군들의 수륙병진 작전에 제동을 걸었으며, 남서해안의 제해권을 확실히 장악하게 된다.
결국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정벌의 야욕을 꺽어버린 해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만약 이순신의 한산해전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 남ㆍ서해 우회작전이 성공하고 다시 수륙 병진하여 명나라로 진격하였다면 한일합방(1910년)의 역사는 그 시절이 약 300여전으로 소급되었을 수도 있었으며, 그 당시 내우외환에 극도로 혼란했던 명나라의 형편으로 보아 일본의 대륙지배가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순신의 해전사가 서방에 알려진 후 대표적으로 영국의 해군 중장(해전사 연구가) 밸러드(G. A Ballard)는 "이 해전으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려던 야망은 급속히 끝을 맺었다.

이것은 위대한 조선의 제독이 세운 빛나는 전공 때문이었다. 그토록 짧은 기간에 그는 전 세계 해전사상 유례가 없는 연전연승의 전공을 세웠다. 영국이 자랑하는 넬슨(Nelson), 블레이크(Blake)라 할지라도 이 지휘관보다 더 많은 승리를 할 수는 없었다."하고 평가했다.

또한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발틱 함대를 괘멸시킨 일본의 도고 헤이하지로제독은 이순신의 학익진을 본따 丁자 전법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자신은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하사관 정도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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