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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 관련 구전 자료 집중 발굴
동학농민전쟁 관련 구전 자료 집중 발굴
  • 남해안신문
  • 승인 2005.01.05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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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야기] 화양면 - 서촌리
곡화목장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하여 이름을 얻게 된 서촌리(西村里)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서 서촌, 봉오, 석교를 합쳐서 서촌리라 부르다 1965년 봉오리가, 1980년엔 석교리가 행정리로 각각 분리됐다. 옛 말로 마을 이름을 ‘시핀’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서편이란 말의 사투리로 보인다.

일제시대 까지도 동편 화동리 마을과 사이에 있는 개천을 중심으로 하여 줄다리기와 씨름 등의 민속놀이가 아주 성행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로 보아서 곡화목장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자리한 두 마을이 이 지역의 중심마을이었던 모양이다.

서촌 북쪽에 석교마을로 가는 길목 골짜기에는 ‘피우실’이란 땅이름이 전해오는데 지명학자들은 피우실을 풀이 우거진 골짜기란 뜻의 풀실이 ‘풀+실 > 푸+실 > 피우실’로 변한 말로 보지만, 이 마을에서는 동학 때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어 피를 많이 흘린 곳이어서 피우실이라 하였다고 이해를 하고 있다.

화양면에는 이 곳 피우실 외에도 이목리의 ‘피내골짜기’와 장수리 일대에 동학농민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왔는데 ‘피우실’과 ‘피내’의 피를 전쟁시 흘렸던 피로 연상하며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역사가 되었다.

최근 조사를 통하여 발굴된 동학농민전쟁관련 여수의 구전자료는 화양지역에서 집중되어 발굴이 되었다.

이는 화양지역에 설치되었던 곡화목장이 조선시대 사복시에 소속되어 말을 키우던 목자 대부분이 대를 잇는 종의 신분이었기에 신분타파의 열망이 컸던 지역정서에 영향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동학과 관련된 봉오마을 출신이던 심송학에 관한 일화는 여수지역 동학농민운동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로 내용은 이렇다.

순천을 중심으로 하였던 영호대도호소의 대접주 김인배는 좌수영성을 공격하기로 하여 3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해룡과 율촌을 거쳐 덕양역에 진을 치고 좌수영성을 공격하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때 여수지역의 동학군도 가세를 하였는데 3천여 명으로 알려진 여수 동학군의 대장이었던 심송학 도접주는 화양지역 전투이후에 붙잡혀 죽음을 당했지만 봉오마을의 심씨가에서는 후손에 자랑스러운 조상의 이야기를 대물림하여 족보까지 지워버린 심송학의 높은 뜻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서촌 북쪽에 있는 석교리(石橋里)는 본래의 마을 이름인 <독다릿개 designtimesp=29163>를 한자로 바꾼 이름으로 서촌에서 마을로 가려면 낮은 갯벌을 지나야 했기에 이곳에 큰 바윗돌을 놓아 돌다리를 만들게 되어서 돌다리가 있는 개(浦)란 뜻으로 '독 다릿개'라고 이름 지어져 이를 줄여 ‘다릿개’란 이름으로 불려지는 마을 이름이다.

마을에 빈대처럼 작은 들이란 뜻인 ‘빈디얍떼기’. 바닷물이 넘어오는 끝이란 뜻의 ‘무넘네 날 등의 이름이 전해온다.

서촌의 남쪽에 있는 봉오동(奉梧,鳳梧洞)마을은 마을의 옛 이름을 ‘봉골’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봉화산에 있는 봉군(軍)들이 이 마을에 살면서 봉수대를 교대로 지켰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었다.

그래서 옛 기록에는 봉화봉(烽) 자를 쓴 봉동(烽洞) 이었다가 받들봉(奉)자로 바뀌었고 다시 새 봉(鳳)자로 바뀌는 과정을 겪었다.

봉오마을의 마을 유래에는 봉황새에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선조 노인의 꿈에 봉황새가 오동나무에 앉는 지역에 마을을 이루었다는 내용인데 이는 마을의 이름에서 한자가 바뀌게 된 사연과 무관하지 않다.

봉황전설과 함께 전해오는 이목으로 넘던 길목에 있던 할미당에 관한 전설은 원님도 내려서 걸어야 했다는 하마등에서 이를 모르고 가마로 넘다 죽은 시집가던 처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고갯마루 할미당에 돌을 던져 넋을 달랬다고 한다.

하마등은 향교나 관청 앞에 세워 이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서 예를 갖추게 하였던 표석으로 마을에도 마을 어귀에 말을 내리는 지점을 정하여 하마등이라 하여 하마등 에서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는 말에서 내리는 것이 마을에 대한 예의였던 옛 풍속으로 여러 마을에서 비슷한 전설이 있는 것을 보면 하마등에서 말이나 가마를 내리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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