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과 어우러진 조용하고 한적한 어촌마을
석양과 어우러진 조용하고 한적한 어촌마을
  • 남해안신문
  • 승인 2004.12.16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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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야기}화양면 - 옥적리
옥적리(玉笛里)는 마상, 신기, 대옥, 소옥, 산전을 병합한 법정리의 이름이며 신기와 소옥만을 칭하는 행정 마을명이기도 하다.

곡화목장이 있던 조선시대에 여러 마을의 목동들이 모여들어 말거리 산이라 불렀다는 산자락이 남서쪽으로 길게 뻗쳐, 큰 골과 작은골을 이루고, 이 산의 모양이 옥피리를 닮았다하여 마을 이름을 옥적이라 하였다 전해온다.

비슷한 형상의 지형이었던 율촌면의 취적(吹笛) 마을도 뒷산의 이름이 ‘대통산’으로 대나무 통 모양으로 생긴 산의 모양에서 마을 이름이 생겨난 점으로 보아 전해오는 유래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옥적 마을의 유래와 함께 옥피리형 지세에 대한 풍수의 설명도 전해오는데 이런 지세에 터를 두고 살게 되면 자손들이 널리 좋은 이름을 떨치게 된단다.

소리가 아름답고 멀리 퍼지는 옥피리의 특성에 연상된 믿음이 아닐까? 풍수지리를 모르는 필자의 식견으로야 옛이야기 모두가 신비한 이야기일 수 밖에....

이런 신비한 힘을 가진 옥피리 산의 동쪽 큰 골짜기 마을은 대옥마을 이라하고 서쪽의 작은골 마을을 소옥이라고 했다.

신기마을은 우리말 땅이름으로 ‘새 터’로 불려지는 마을이다. 마을이 새로 터를 잡은 시기로 임진왜란 이후에 인동 장(張)씨가 이주를 해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으며 이 마을 출신인 학자 장태지(張泰址)는 1858년에 태어나 돈녕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종2품 벼슬)에 까지 올랐다가 낙향하여 향리의 후학들을 가르쳤다.

마을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옛 초등학교는 1948년 개교하여 50여 년 동안 주변마을 기초교육을 담당하다 1999년 폐교되었다.

천하의 근본이라던 농자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 농촌 대부분이 젊은이들이 떠나면서 재잘거리던 어린학생도 더 이상 없어 큰 학교로 통합되었다는데 잡초 우거진 교정은 농촌 현실만큼 을씨년스럽다.

감도를 마을을 남으로 지나면서 만나는 마을 마상리(馬上里)는 본래 <몰산개 designtimesp=21020>라고 하던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고쳐 부르게 된 이름으로 `몰'은 `말[馬]'의 고어(古語)로 곡화목장(曲華牧場)시절 말을 방목할 때, 말을 잡기 위해서 말을 몰이하여 잡았던 곳을 이르는 말인데 가까운 돌산읍에도 마상포마을의 본래의 이름이 ‘몰산개’였다고 전해온다.

마상마을 남쪽 해안에는 <기밀개 designtimesp=21023>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기밀개’는 해안가 마을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구미포(九尾浦) 라는 이름으로 기록했다.

석양과 어우러진 조용하고 한적한 어촌의 모습에 빠져있다 보면 잠시 일상을 다 잊어버릴 만큼 아름다운 여수의 비처(秘處)중 한 곳이다.

상전리는 웃몰 상촌과 산전, 논골마을로 나누어지는데 산전(山田)은 곡화목에 있었던 4군데의 송전(松田)중 한곳이다.

송전은 널(관)이나 집을 짓기 위한 목재, 배를 만들기 위한 선재 등 좋은 목재를 생산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지정을 하여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고 가꾸었던 곳으로, 송전의 나무를 함부로 벤 사람을 엄하게 다스렸던 기록이 난중일기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나타난다.

곡화목의 4군데 송전은 옥적리의 산전과 화동리의 산전, 이목의 산전(자치내), 고진의 송소(松所)가 있으며 고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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