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산포만호진이 떠난 고돌산진을 줄여 고진이라 불러
돌산포만호진이 떠난 고돌산진을 줄여 고진이라 불러
  • 남해안신문
  • 승인 2004.11.1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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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야기] 화양면 용주리
화양면 동북쪽의 법정리 용주(龍珠)리에는 고진과 고외, 호두, 화련마을이 있다. 용주리의 마을 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이름 지어졌는데 이 지역 포구의 이름이 예로부터 용진개 또는 용문포라고 하여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한다는 뜻을 담았다. 용과 관련된 이러한 이름들은 포구 가까운 곳에 위치한 용문사와 관련이 있다.

용주리 서쪽 건너편에는 비봉산이 있고 이 산 중턱에 조계종 산하의 화엄사 말사로 등록된 용문사(龍門寺)가 있다. 용문사는 통일신라 효소왕 1년(692) 主司僧 文德, 慧遠, 憲將 또는 당나라 고승 道證法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문헌과 유물 등이 없어 그 내용을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용문사를 오르기 전 만나는 마을 성주골은 곡화목장의 성주가 살아서 성주골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목장은 감목관이 관리하였기에 성주와는 거리가 멀다. 절터가 있는 지역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성주골’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 전통 신앙이던 성주신을 모시던 신앙에서 고을마다 성주를 모시는 골짜기를 두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곳에 절터가 자리 잡기 좋았던 모양이다. 여수지방만 하더라도 여러 곳에 ‘성주골’이라는 땅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성주골 북쪽의 화련마을은 화교와 연기마을을 합하여 화련이라고 하였다. 이 중 화교마을은 화양면의 유명한 마을 ‘깨때기’이다. 여수에서 화양면 사람이라고 하면 깨때기 사람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게 되는데 특이한 이름이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모양이다.

깨때기라는 우리말은 깨와 때기(뙈기)가 더하여진 말로 작은 지역이라는 뜻으로 보는데 향일암이 있는 임포가 작은개라는 뜻의 ‘깨개’이고 작은 돌을 ‘깻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깨를 작다는 뜻으로 하여 깨때기는 작은 때기라는 뜻으로 그 의미를 풀이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화교(花橋)는 깨때기를 꽃다리가 변한 말이라 하여 한자말로 꽃 화(花)와 다리 교(橋)자로 표기한 땅이름으로 그 의미가 다른 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용주리 일대는 조선시대 여수지방의 중요한 해상방어의 요충지로서 돌산만호진이 설진되어있어 지금의 마을 이름에서도 옛 역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지역에 있었던 돌산포만호진은 조선초기의 태종실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나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설진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처음에는 용문포의 입구에 있다가 지금의 고진 마을로 옮겨갔다.

이러한 사실은 용문포 입구의 땅이름으로 ‘영터’ 라는 곳이 전해오며 ‘영터’는 영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시대 만호진이나 첨사진 등의 진이 있던 곳을 부르는 말로 쓰였기 때문이다. 영터의 이름은 이후에 한자로 표기하면서는 영을 연꽃 연(蓮)자로 바꿔서 연기(蓮基)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

조선 중기가 되자 남해안을 침입하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고 조선도 국력이 커지면서 남해안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 수군진이 전진 배치된다.? 돌산포만호진도 이 시기에 성을 쌓아 진의 위용을 갖추었는데, 이때가 성종 16년으로 성은 5년간에 걸쳐 완성되어 성종21년 서기1490년 6월에 성이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이렇게 성을 쌓고 나니 성안과 성밖의 사람들이 나눠지게 되어 마을 이름도 성안과 성밖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되고 500 여년이 지난 지금도 성안과 성밖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성안과 성밖마을은 합하여 고진마을이라고 부른다.

고진이란 이름은 돌산포만호진이 1522년 중종17년에 남해안 수군 진을 보강하면서 왜적의 침입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지금의 돌산읍 군내리에 방답첨사진을 설진하고 돌산포만호진을 혁파(革罷)하여 돌산포만호진은 권관을 두어서 지키는 작은 진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름도 고돌산진(古突山鎭) 이 되었다.

고진(古鎭) 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만들어진 고돌산진을 줄여서 부르던 이름으로 세월이 지나면서 마을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고진마을은 성 안쪽과 성밖을 구분하여 성안마을을 고내, 성밖마을은 고외마을로 구분하고 있다.

지금도 고진마을 주변에는 돌산포만호진 시절에 쌓았던 성이 남아있으며 군선이 묶여있던 마을 앞 굴강도 주차장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어서 문화유적을 답사하는 탐사객이 자주 찾는다.

고진마을의 고돌산진터가 있는 작은 산등성이는 수박처럼 둥근 모양이어서 수박등이라고 한다. 수박등은 고지도에서 수복등(壽福嶝)이란 이름으로 표기되고 있으며 풍수가들로부터 길지(吉地)라고 알려져 지방의 재력가가 이를 알고 마을 앞으로는 시신을 운구할 수 없다는 마을의 관습을 마을 유지를 매수한 후에 무마하고 수박등에 묘지를 썼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19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수박등의 키 큰 적송가지를 집을 삼아 수많은 학과 백로가 무리를 지으며 살았으나 환경오염과 갯벌이 줄어들면서 지금은 자취를 감추다가 다행스럽게 얼마 전부터 남동쪽에 있는 대섬에 다시 찾아와 둥지를 틀고 있다.

고진마을 동쪽 해안으로 나아가면 호두마을에 이른다. 호두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여우의 머리모양을 닮았다하여 우리지방의 여우의 사투리인 ‘여수머리’로 불려지는 땅이름을 한자로 옮긴 마을이름이다. 최근 영화 촬영을 위한 초가집 해안마을이 세트장으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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