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청풍(竹林淸風) 고사용출(高士聳出) 뛰어난 선비 배출
관기는 관이 있던 터일까 여관이 있던 터일까
죽림청풍(竹林淸風) 고사용출(高士聳出) 뛰어난 선비 배출
관기는 관이 있던 터일까 여관이 있던 터일까
  • 남해안신문
  • 승인 2004.09.14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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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면 - 죽림, 관기
소라 면소재지인 덕양에서 화양면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위치한 죽림리에는 <원죽(元竹)> <신송(新松)> <상금(上金)> <하금(下金)> <차동(車洞) >이란 다섯 마을이 있다.

원죽마을은 죽림마을이 처음 터를 잡았던 곳으로 이름그대로 마을 주변에 대나무가 많아서 지어졌다고 하며 죽림청풍(竹林淸風) 고사용출(高士聳出)이라 하여 예로부터 뛰어난 선비가 많이 배출된 마을로 전해 온다.

신송마을은 저수지 부근에 있는 마을로 마을주변에 20여기의 고인돌이 전해오고 있어 마을의 오랜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특히 60년대 밭을 개간할 때 고인돌 무덤방에서 돌로 만들어진 쟁기가 발견되었는데 여수반도에서  선사시대 이전부터 농사를 지었던 흔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상금과 하금 마을은 처음 ‘쇠실’이라고 불리던 지역을 한자로 금곡(金谷)이라 하였다가 윗 아래 마을로 나뉘게 된 이름이다. 쇠실 일대는 예로부터 철이 많이 나던 지역으로 알려지다 일제시대에는 금을 채굴하던 광산까지 여러 군데 들어섰지만 경제성이 떨어지면서 폐광이 되었다.

마을 아래로는 관기들에 물을 공급하는 죽림저수지가 조성되어있어 민물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무선산 아래에 자리한 차동(車洞)마을은 ‘수리골’이라고 불렸던 옛 이름에서 수리를 훈이 비슷한 ‘수레 차(車)’로 바꿔서 차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차동마을 주변의 땅이름들로는 작은 하천 여러 개가 모여서 요강모양의 도랑이 되었다는 ‘요강더리’ 돌무덤이 많다는 ‘다무락들’ 논에 물이 많다는 ‘시우더리’ 풀무 모양의 골짜기 ‘불무골’ 등의 이름들이 전해온다.

소라면의 가장 남쪽에 있는 관기(館基)리에는 ‘상관(上館)’과 ‘하관(下館)’, ‘성본(城本)’마을이 있다.

상관과 하관의 관기마을은 ‘관터’라고 부르던 마을 이름을 한자로 고쳐 부르는 이름으로 마을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화양면에 있던 곡화목장으로 드나들던 사람들이 묵어가던 여관이 있어서 관(館=객사,여관)터라 하였다는 설과 옛날부터 관리들이 살았던 터이기 때문에 관(官=벼슬)터 라 하였다는 설이다.

하지만 관기리의 주변을 살펴볼 때, 성본 마을과 창무리 사이에 있는 ‘사또방천’이라는 지명이 전해오고 있고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조라부곡 >의 위치 등을 고려하면 실제 관의 역할을 하였던 곳이 이 마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참고로 1900년부터 1914년까지 있었던 덕안면도 소재지를 관기마을에 두기도 하였으며 1914년 구산면의 일부와 함께 소라면으로 통합이 되면서 초기 면사무소는 관기리에 두었었다.

?관기리 마을 아래에 넓게 펼쳐진 관기들은 1922년에 일제의 고뢰농장이 조성한 들로 화양면 백초리와 소라면 가사리를 잇는 764m의 제방을 막아 75만평의 간척지를 조성한 곳으로 ‘걸망개’로 불려지던 곳이 ‘걸망들’이 되었다.

관기리의 ‘성본(城本)’ 마을은 옛 이름이 ‘고재’ 또는 ‘꽂재’라고 하였다.

마을이 바닷가로 튀어나온 곶의 형태여서 이렇게 불려졌던 것을 꽃재로 해석하여 진달래가 많았다는 유래를 만들며 한자로는 화치(花峙)로 기록하였으나 훗날 마을이 커지면서 성터 앞마을이라는 의미로 성본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관기마을 주변의 땅이름으로는 걸망처럼 생긴 포구의 이름인 ‘걸망개’, 남해 사람들이 와서 살아서 ‘남해촌’ 장으로 가던 ‘장고개’ 구름이 많은 골짜기 ‘구름실’, 서낭당 있었던 ‘사랑뎅이’ 안심산과 비아산 선달봉과 매봉산 등의 이름과 손더듬이라고 하는 들돌 등이 마을에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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