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으동동다리]⑫ 기러기 3일간의 슬픈 비행, 고려 정승 공은
[아으동동다리]⑫ 기러기 3일간의 슬픈 비행, 고려 정승 공은
  • 남해안신문
  • 승인 2004.09.0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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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옥 <여수대햑교교수,여수지역사회연구소이사장>

제석산 아래 묘도로 건너가는 포구가 삼일포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즈음 이곳에 고려 말 문화시랑평장사를 10년간이나 지냈던 공은(孔隱 1348~1403)이 귀양 왔다고 한다.

그는 노국공주가 고려 공민왕과 결혼하여 귀국하게 되자 이 때 수행원으로 와서 귀화한 후 평장사 벼슬을 지낸 공소의 손자요 공자의 56대 손이다.

공은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대단히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고산(孤山)이라 자처하고 개성 근처의 두문동에 은거하고 있었다. 신진 세력들의 끈질긴 회유도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태조에게 바른 학문을 펼칠 것과 불교를 배턱해야 한다는 소(梳)를 올리게 되는데 이게 빌미가 되어 여수 진례산 문바위 밑 해안가에 귀양을 오게 된다.

그런데 공은은 천리가 넘는 길을 오다가 그만 병을 얻어 이곳에 도착한 지 삼일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얼마 후 이성계는 그를 다시 쓰고자 한 신하를 유배지로 내려보냈다. 어명을 받은 신하는 말을 달려 서둘러 여수로 내려 왔다. 기러기 세 마리도 신하를 따랐다. 그런데 그 신하가 적소(謫所)에 도착했을 때 이미 공은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신하를 따라 온 세 마리의 기러기는 공은의 타계 소식에 슬피 울며 3일 동안 하늘을 배회하다 땅에 떨어져 죽어 버리고 말았다. (기러기는 공은이 귀향올 때 따라 왔으며 그가 도착한 지 3일 만에 죽자 이 때 기러기가 땅에 떨어져 죽었다고 전하는 사람도 있고 기러기가 아니라 백학이 따랐다고 전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삼일포와 낙포가 생겼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초상이 나면 진례산 너머 제석산 꼭대기에 있는 탑 같은 돌들이 하나씩 굴러 떨어져 나갔다고 하는데, 그래서 낙포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려 말 여수현감 오흔인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불복하는 뜻으로 성문을 굳게 닥고 척사를 맞지도 않았고 조정에 세금을 바치지도 않았다. 이에 태조는 1397년(태조 5) 여수현을 없애 순천부에 편입시켜 버렸다.

태조가 공은을 이곳으로 귀양 보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곧, 조선 초기 왕권 확립을 위해서 그 반대자들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철퇴를 내렸을 것이다. 그 여파는 조선 시대 내내 여수 사람들에게 이어진다.

1897년 여수군이 설치될 때까지 500여 년 간 여수 사람들은 순천부민으로, 여수 좌수영 군졸로 살면서 두 곳에 다 세금을 내야 하는 부역을 감내해야 하는 등 이중고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속에서도 세 번이나 복현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결과는 실패뿐이었다.

고려 말부터 왜구들의 잦은 침입을 막고 누란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한 옛 여수사람들은 얼마나 허탈했을까? 비록,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귀양온 역적(?)의 죽음으로 생긴 지명에 절의 정신이 눅눅히 묻어 있음을 누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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