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야기]마을 뒷산이 황새봉과 연결되어 봉두(鳳頭)
바다에 떠 있는 배의 형국 ‘닻 촌’으로 불려
[땅이야기]마을 뒷산이 황새봉과 연결되어 봉두(鳳頭)
바다에 떠 있는 배의 형국 ‘닻 촌’으로 불려
  • 남해안신문
  • 승인 2004.09.0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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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
봉두리마을은 1구에 <원봉두>와<백수동> 2구에는<당촌>3구에는 <의곡>과 <운암> <금대> 마을로이루어져 있다. <원봉두> 마을은 봉두 마을 중에 처음 생긴 마을이어서<원봉두>라고 하였으며 백수동은 마을이 100여호나 되는 큰 마을이어서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당 촌’ 또는 ‘닻 촌’이라 부르는 ‘봉두 2구’ 마을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바다에 떠있는 배의 형국이어서 이렇게 불렸다고 전해 온다.

그래서 예전에는 마을에 우물을 파는 일을 금기시 했다고 한다. 배의 형국에 우물을 파는 일은 바다에 떠있는 배 밑창을 뚫는 일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봉두의 이름은 일제식 행정구역 개편이 있던 1914년 이후에 만들어진 마을 이름으로 마을 뒷산이 길지로 알려진 황새봉과 연결되어 있고 황새봉의 머리에 해당되어 봉두(鳳頭)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봉두에서 여수시립공원 묘지가 있는 북쪽 방향으로 이어진 오른쪽 길을 따라 오른편 산을 보면 산은 정상에서부터 긴 산등성이가 곧게 뻗어 내린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 곳을 '진버듬' 이라 하고 그 아래 개천을 ‘바드내’라고 부른다.. 산의 길고 곧게 뻗친 형상이 이런 땅이름을 만들게 된 것이다.

‘진버듬’ 끄트머리를 지나고 나면 외쪽 편으로 산이 깊은 상처를 안고 흉물스럽게 서있다, 이 곳은 건설용 석재를 공급하기 위해 석산이 들어서면서 수년간 골재를 채취하면서 생겨난 결과로 이 곳은 '갑의산' 이라는 산 이름이? 임진왜란 때 충무공께서 이곳에서 피 묻은 갑옷을 갈아입었다는 전설과 함께 전해오는 곳이다.

<갬실 designtimesp=4015>마을은 <개미실 designtimesp=4016>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개미의(蟻)자와 골짜기란 뜻의 곡(谷)자를 써서 의곡(蟻谷)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며 청개미와 정자에 얽힌 전설이 전해져 온다. 이는 마을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개미의(蟻)자를 쓰게 되면서 지어진 이야기로 보인다.

<갬실 designtimesp=4019> 또는 <개미실 designtimesp=4020>이란 옛 지명의 어원은 본래 우리 땅이름에 많이 나타나는데 큰 골짜기란 뜻이다.

옛말로 크다, 위대하다, 으뜸이다, 의미로 쓰이던 ‘감’이란 말이 가마로 변하여 '감실 > 가마실 '로 변하여 가마 부(釜)자를 써서 부곡(釜谷)이라 하고 ‘곰실'로 변하여 웅곡(熊谷) 또는 웅촌, ’거무실' 로 변하여 흑곡(黑谷) 또는 현곡(玄谷),‘가마실’>‘거무실'로 변해 주곡(蛛谷), 이 마을처럼 개미실로 변하여 의곡으로 변한 것을 전국 여러 곳의 지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결국 갬실은 개미의 골짜기가 아니라 큰 골짜기 으뜸의 골짜기란 뜻이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여수(麗水)반도에서 이 곳 갬실마을은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며 가장 길고 큰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어 그 뜻과 일치한다.

최근 시립공원묘지가 들어오면서 일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갬실이 개미의 골짜기이고 풍수학적으로 개미의 혈이니 죽은 송장을 물고 들어오는 형국을 피할 수 없다는 등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이는 의곡의 한자말 에 포함된 개미의(蟻)자에서 상상된 풍수와 관련 없는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갬실 designtimesp=4029> 마을에는 세 군데의 범우골이 있는데 그 뜻은 범(호랑이)이 울었던 골짜기란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우리지방에서도 호랑이를 잡아 그 일을 포상하고 격려하는 내용이 나타나는데 이 곳도 호랑이들이 살면서 그 울음소리를 뽐내었던 곳이 아니었을까?

<운암 designtimesp=4032>마을은 본래 운암사라는 절이 있어 그 이름이 생겼다 하나 지금은 절은 사라지고 채석장이 있는 남서쪽 골짜기가 절 꼬랑이라는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

운암 마을에서 금대를 향하는 길은 소형 승용차나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시멘트 도로로? 우측 산봉우리로 시선을 돌려보면 심상치 않게 생긴 바위가 눈에 띈다. 이 바위가 운암마을의 이름을 낳았다는 ‘쉰질바구’이다.

운암 마을의 이름은 산이 높아 구름 속에 바위가 보인다 하여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며 사람 키의 50배가 된다는 뜻의 ‘쉰질바구’가 구름 속에 보인다 하여 운암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운암 마을 안쪽의 <금대 designtimesp=4039>마을은 본래 신성한 지역을 표시하는 솟대와 같은 의미의 ‘짐대’가 세워진 마을로 예전 절이 있던 시절에 입구에 ‘짐대’가 세워져 있어 마을 이름으로 굳어진 곳으로 보인다.

지금도 유도라는 종교를 가진 분들이 종교적 생활을 실천하고 수행하는 도량과 같은 마을로 지리산의 청학동처럼 머리를 땋고 한복을 입고 생활을 하고 있어 이 지역을 더욱 신비롭게 보이게 한다.

금대마을은 금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광산 업자들이 금맥을 찾으려고 여러 차례 시도를 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의 좌, 우편의 골짜기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라는 대나무와 함께 절터로 말하는 텃자리가 있는데, 동쪽 골짜기에는 한산사라는 절이 있었고, 서쪽 골짜기에는 양산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금대마을 서쪽 산에는 전쟁이 나면 마을 사람이 이 굴로 피신하여 생활을 하였다는 ‘짐대굴’이 있다. 커다란 바위와 바위가 겹치면서 그 틈새에 생겨난 이 굴은 들어가는 입구는 너무 좁아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가는 크기 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수십 명이 쉴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다.

이 굴은 임진왜란이나 동학농민전쟁, 여순사건 때에도 사람들이 난을 피신한 굴로 유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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