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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으동동다리] 서불과차 (徐市過此)
[아으동동다리] 서불과차 (徐市過此)
  • 남해안신문
  • 승인 2004.08.24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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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옥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중국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무진 오래 살고 싶어 시종 서불(徐市
-徐福)을 불러 동방 삼신산을 찾아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어명을 내렸다. 그래서 서불은 동남동녀 수천명을 거느리고 삼신산으로 떠나게 되는데, 여수에도 두 군데나 다녀갔다고 한다. 소리도(연도)와 월호도가 그 곳이다.

서불 일행은 먼저 경상남도 남해에 도착했다. 그들은 불로초가 있을 만한 곳은 다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 흔적조차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사냥만 즐기다가 남해 상주면 양아리에 있는 바위에다 '서불과차(徐市過此 서시일행이 이곳을 지나가다)'를 새겨 놓고 여수 남면 소리도로 출발했다. 혹시 그곳 필봉산에 불로초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그들은 산을 샅샅이 뒤졌다. 역시 찾지 못했다. 도리어 장수 2명만 잃기만 했다. 일행은 장군 두 사람의 장례를 이곳에서 치른 다음(진시황의 장군이 죽어 이 곳에 묻혔다는 2기의 묘가 있으며 이곳 사람들은 이를 '장군묘'라고 부르고 있다), 남해 양아리 바위에다 새겼던 것처럼 까랑포 해안 절벽 바위에다 붉은 색깔로 '서불과차'를 새겨 놓고 다시 떠났다.

그들은 월호도를 니나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그들은 불로초를 찾았으나 실패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러면서 역시 소리도 해안에 새겨 놓은 것처럼 남쪽 해안 칼바위에다 '서불과차'를 새겨 놓고 떠났다.
후세 사람들은 이로 인해 이 마을을 글성마을(글쓴이-글을 잘하는 동네라 명명했다고 한다)이라 하였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얼마전까지 만해도 돌에 새겨진 모양은 글씨가 분명했는데 두 곳 모두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뭉개져 그 뜻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관한 비슷한 이야기는 제주를 비롯해 남해 통영 등에도 전한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제주도 정방폭포에 '서불과차'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진시황 때 방사(方士)였던 서불이 이곳을 다녀 서쪽으로 갔다는 내용의 전설이 있고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는 뜻의 서귀포(西歸浦)는 그 지명이 이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남해에서 상주로 얼마쯤 가다가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금산이 나온다. 그 산길을 따라 부소암쪽으로 가다보면 '상주리 석각'이라 부르는 거북 모양의 바위를 만난다. 그 바위에는 사슴 발자국 같은 그림이 음각되어 있다. 이 그림을 '서불과차'로 읽는 사람도 있다.

통영 앞 비진도 깎아지른 절벽에는 부처바위, 형제바위, 용바위, 촛대바위 등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부처바위 옆에는 3개의 석산이 솟아있고 그 석산 아래에는 제법 넓은 굴이 뚫려 있다. 바로 그 천장에 '서불과차'가 새겨졌다 해서 글씽이굴이라고 한다.

서시 일행이 불로초를 찾아 이곳저곳을 다녔다는 이야기가 남해안 중심으로 비슷하게 전승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환단고기'의 기록을 보면 환웅천왕은 신지에게 문자를 만들게 한다. 어느날 사냥을 나갔던 신지는 사방을 수색하다가 사슴 발자국을 발견한다, 그것을 보고 비로소 기록을 남기는 방법을 깨달아 사삼 발자국 같은 그림으로써 문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 증거로 들어 이들 암각화가 우리나라 고대문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거대 거란족의 문자라고 하는 사람, 산스크리트 계통의 글자라고 주장하는 사람, 사냥터 표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글자도 같은 그림도 같은 이런 흔적을 옛날 사람들이 남겨 놓은 문자로 해석하려는 것은 옛 선인들의 의사 소통 방법을 규명하는 일이요 나아가 인류 언어 문화의 근원을 찾는 일이다.

곧 여수해안에 남겨진 이런 암각화는 옛날 여수사람들의 언어였으며 차원 높은 문화생활을을 영위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궁극적으로 여기에서 여수사람들의 자존을 찾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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