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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장인 4]“내가 만든 보석 언젠가는 칸느 간다”
[여수의 장인 4]“내가 만든 보석 언젠가는 칸느 간다”
  • 정송호 기자
  • 승인 2004.06.29 1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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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공방’ 보석세공사 김완채(35)씨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2004칸느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이 있었다. 다름아닌 한 보석 세공회사의 직원이 만든? ‘팔므 도르(Palme d Or)' 상. 이 상은 그랑프리를 수상한 미국의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9/11‘에게 돌아갔다.

여수에도 언젠가 자신의 손때가 묻은 보석이 세계의 눈을 사로잡고자하는 열망에 가득 차 있는 한 보석 세공사가 있다.

여수시 충무동의 3평 남짓한 허름한 공방을 운영하는 보석세공사 김완채(35)씨. 전통적인 장인들에 비해 신세대층에 속하는 나이지만 보석과 씨름한 지 벌써 16년째다.

대부분의 장인들이 그렇듯이 ‘먹고 살기위한 방편’으로 기술을 배운 것이 계기가 됐듯이 그도 13살 때 부모님을 여의고 일찍이 여수 교동의 ‘광금당’에서 수련공 생활을 시작했다.

오전 10시부터 새벽 3시가 넘어야 하루 일이 끝나는 고된 시간을 열혈청년이 견뎌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2년이 넘도록 알반지 광만 내면서 공장 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했던 시다 생활은 “기술을 배워야 먹고 살수 있다”는 의지로 견딜 수 있었다.

은으로만 연습을 해야했던 수련공 생활 5년만에 처음으로 광금당 변재남 사장이 금으로 반지를 한 번 만들어보라는 제안을 받은 그는 그만 로라에 손이 끼어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입은 손가락 상처 탓에 지금도 처음 금반지를 만들던 일을 그는 절대 잊지 못한다.

28살에 결혼을 한 그는 지금의 자리에서 ‘비취공방’을 차리면서 독립선언을 했다. “금보석을 장만하는 사람들의 소중한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열심히 만든다”는 그에게는 단골 손님들이 꽤 있다. 요즈음 경기가 워낙 안좋아 금회수율이 낮아 애를 먹고 있지만 보석세공의 공임이 너무 싸 넉넉한 생활은 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한다.

여수에서 비취공방같은 곳은 대략 13곳이지만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하지만 보석세공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앞으로 10년 정도 후면 제대로된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보석세공 기술의 잣대는 보석의 ‘원틀’을 만드는 일이다. 지금은 상당부분 기계화가 됐지만 원틀을 만드는 일만큼은 장인의 손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아직 기계화가 되어 있지 않은 여수의 공방은 세공사들의 뛰어난 손재주가 살아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는 “사실 우리나라 보석은 브랜드가 없어서 별로 라고 생각하지만 일본에서도 유명한 보석들은 모두 한국사람이 만들고 있다”며 자체 브랜드 개발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자신이 가장 어려울때 보석세공사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켜 준 변재남 사장을 잊지 못했다. 가슴 한 켠에 빚진 마음이 남아 있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광금당을 나온 이후 여태 “고맙다는 인사를 못 드렸다”며 아쉬워했다.

인터뷰 내내 “나보다 더 뛰어나신 분들이 많은데 내가 언론에 소개돼 선배님들에게 죄송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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