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도청사수대' 故서호빈씨 시민품으로
'5·18 도청사수대' 故서호빈씨 시민품으로
  • 정송호 기자
  • 승인 2004.05.21 18: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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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출신 유일한 사망유공자 인정
유가족 "24년간 폭도오명... 이젠 자랑스러워"
얼마 전 24년 만에 여수에서 처음 열린 '5.18 기념식 행사장'에 '도청사수 시민군중 여수 유일한 사망자'인 故서호빈씨(당시 22세)의 분향소가 마련돼 지나가던 시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이제 도청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총부리를 겨누는구나"라는 故서호빈씨가 몇 일간 도청사수 때 기록한 일기 내용에는 당시의 긴장감을 아직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일기장은 "5·18 상황이 종료 후 故서호빈씨의 동문들이 가져가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며 형 서동한씨는 동생에 대한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故서호빈씨는 낭도초등학교와 구봉중학교, 여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8년 전남대 화공과에 입학해, 1980년 5·18광주민주항쟁 당시 전남대 공대 화공과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형 서동한씨는 2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가족들은 "나간지 3일이 되었는데 아직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전화와 27일 도청 진압이 끝난 직후 "도청에서 최후까지 남아 있다 진압군에 의해 죽었다"는 비보를 당시 故서호빈씨의 여자친구로부터 받았다.
연락을 받은 27일 오후 늦게 택시를 타고 광주로 올라갔지만 어디에도 서호빈씨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으며, 여자친구가 찾아 가지고 온 '시계와 안경'을 붙잡고 눈물만 흘렸다고 했다.
한편 다음날 28일 도청과 상무대는 '시신확인 요구'를 하며 오열을 토하고 있는 유족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이러한 유족들의 요구에 '29일 아침 시신을 확인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29일 아침에 갔을 때는 "시신은 이미 새벽에 청소차로 모두 망월동에 가져다 묻어버렸다"는 허망한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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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망월동에 있는 유골들을 분산시키기 위한 정책으로 갖은 협박을 받은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만성리로 유골을 옮겼다"고 서동한씨는 전했다. 그리고 망월동이 국립묘지로 조성되면서 다시 망월동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5·18 광주민주항쟁이 역사의 올바른 평가를 받기 전까지 故서호빈씨 가족은 "옛날에는 폭도 가족이라고 해서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며, "지난해 국가유공자증이 나오기 전까지 동생의 죽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했다.
故서호빈씨가 부모님은 둘째 아들에게 줄 사랑을 큰 손녀딸(서동한씨의 장녀)에게 아낌없이 주고, 아버님은 4년전 작고하시고 지금은 어머님 홀로 살고 계신다.
한편 서동한씨는 매월 첫째주 토요일 광주에 '5·18광주민주항쟁 유족회 회의'를 나간다며,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행불자 가족들은 아직도 대문을 닫지 않고 24시간 열어놓고 산다며 그래도 이분들보다는 마음이 편하다"며 '도청사수 시민군중 여수 유일한 사망자'인 동생 서호빈씨의 죽음에 관한 24년 간의 가슴아픈 하소연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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